부엌의 큰 조력자, 오븐레인지
그야말로, 스마트폰을 제외한다면 올인원 기술의 집약체가 아닐는지. 주방 상판에 올라가 있을 법한 굵직한 제품을 한 몸에 담았다. 전자레인지, 오븐, 에어프라이어, 찜기, 음식건조기 같은 것 말이다.
신혼 때 원대한 목표를 갖고 오븐과 전자레인지가 같이 되는 제품을 구매했다. 살면서 이걸로 적어도 케이크 두세 판 정도는 구울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주먹만 한 비스킷만 두어 번 구어 보고 난 후, 이 덩치 큰 녀석은 전자레인지로 전락했다. 이사할 때마다 이 녀석을 둘 곳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덩치라도 작은 전자레인지를 살 걸.
10평대의 투룸에서 제대로 된 '아파트'로 이사 가던 날. 집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두근거림은 부엌께에서 쫙 사그라들었다. 대체 누가 주방을 디자인한 것인지, 전기밥솥을 넣는 자리와 전자레인지를 놓을 곳이 따로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10평대 도시형 생활주택에도 있는 밥솥과 레인지자리가 20평대 브랜드 아파트에 존재하지 않다니!
만약 자가였다면 돈을 주고서라도 리모델링을 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전셋집이었다. 예쁘지 않은 밥솥과 덩치가 큰 광파오븐은 그리 넓지 않은 부엌 상판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아직은 이전 집보다 넓어진 부엌 상판에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같은 해에, 갑자기 에어프라이어 광풍이 불었다. 친정집에는 이미 에어프라이어가 있었는데, 몇 번 써보니 딱히 좋은지를 모르겠어서 그야말로 '찬장템'이 된 지 오래였더랬다.
그런데 이게 대체 왜 유행하는 거람?
살펴보니, 일명 <에프>가 죽어가는 피자와 치킨은 심폐소생술 수준으로 살려낸단다. 슬슬 외식값이 오르고 있던 때라 쉽게 해 먹는 집밥에 대한 열정이 크던 시기였다.
'밥'을 인사말로 쓰는 맛의 민족답게 순식간에 수많은 에어프라이어 레시피가 쏟아져 나왔다. 통삽겹, 립 같은 고기는 물론 생선도 굽고 과자도 구워냈다. 집에서는 찐 고구마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 여기에서는 군고구마가 된단다. 더 이상 '냉동식품을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에어프라이어는 사지 않겠다'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맘때 즈음, 시어머니께서도 자주 놀러 오는 손자에게 맛있는 밥을 해주시겠다며 에어프라이어를 구입하셨는데, 아아니 이게 맛이 참 제대로였다.
당시 시부모님은 우리 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살고 계셨으나 곧 부산으로 이사를 가실 예정이었던지라, 우리는 한 달에 아이와 함께 두세 번 시댁을 방문하곤 했었다. 어차피 요리똥손인 나는 방문할 때마다 시댁의 에어프라이어의 효능을 누릴 예정이었는데, 이사를 앞두신 어머님이 손자의 입맛이 걱정되었는지 미개봉 중고 에어프라이어를 당근에서 찾아 선물해 주셨다.
그렇게 광파오븐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주방 상판에 에어프라이어가 더 얹어졌다. 에어프라이어의 등장에 남편은 신나서 주저 없이 치킨을 두 마리씩 주문했다. 피자도 무조건 라지로만 시켰다. 두 판을 시킬 수 있다면 주저 없이 그렇게 했다.
'아아니, 어떻게 비워 낸 공간인데!'
나의 외침은 가성비라는 미명 하에 스러져갔다.
거기에 부산으로 이사를 가신 시부모님이 새 커피머신을 선물 받았다며, 이전에 쓰던 커피머신을 우리 집으로 주시는 바람에 주방 상판에는 커피머신의 자리까지 내어주어야 했다.(나는 블랙커피를 즐기지 않지만)
이제 요리하면서 쓸 수 있는 조리대가 이전 10평 빌라에 살았던 시절 수준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안 그래도 요리에 익숙지 못한 나는, 주방 인덕션 양 옆으로 좍 펼쳐진 전자제품의 행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퇴근하고 나서 아이가 과자나 빵을 주워 먹기 전에 재빨리 저녁밥상을 차려야 하는 정신없는 와중에 식재료를 정리해서 냉장고에 바로바로 넣어두지 않으면 그릇 하나 내려둘 공간이 없을 정도로 조리대가 좁아지니 때때로 울화통이 터지곤 했다.
결국 나는 하부장 한 칸을 완전히 비워 광파오븐을 어떻게든 욱여넣고, 잘 쓰지 않는 에어프라이어와 커피머신 역시 전기코드를 뽑아 아예 하부장에 보관하기로 했다. 주중에는 거의 퇴근하지 못하는 남편은 주말만 되면 에어프라이어와 커피머신을 다시 꺼냈지만, 뭐... 대부분의 남편들이 그러하듯(?) 닦아서 다시 하부장에 집어넣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음번 이사를 앞두고 새로운 오븐레인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지금 쓰는 제품은 전자레인지 기능이 영 빈약했고 오븐 기능에는 영 손이 가지 않았으므로, 에어프라이어와 오븐과(지금까지는 안 썼지만 또 모르잖는가!) 전자레인지가 같이 붙어있는 제품으로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새로 이사 온 집에는 오븐레인지가 아예 빌트인으로 들어가 있어서 새로 무언가를 구입할 필요도, 부엌 상판을 내어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둘째 아이 자기 주도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오븐 기능도 몇 번 써 보았는데 이게 한 번 손에 익으니 제법 괜찮았다. 프라이 기능도 있길래 써봤는데 이건 그냥 오븐 기능과 비슷해 보였다.
어차피 에어프라이어 자체가 '튀김기'라기보다는 '오븐'에 가깝긴 하다. 요리가 끝나면 사용한 법랑접시만 씻으면 되니 솔을 들고 에어프라이어 바스켓을 박박 닦던 시절도 끝났다.
다만 남편은 그래도 여전히 에어프라이어가 더 좋다고 한 번씩 꺼내 쓰길래, 매번 설거지도 안 하면서 계속 꺼내놓지 말라고 핀잔을 줬더니 이제는 오븐을 이용하는 경우가 조금 더 많아졌다.
나도 안다. 사람은 원래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손이 더 가는 법이니까.(게다가 설거지나 뒷정리에 신경을 안 써도 되는 경우에는 더더욱)
나는 이제 이 광파오븐 하나만 있으면 냉동밥도, 생선구이도, 토스트도 구워낼 수 있다. 게다가 시선에 거슬리지 않게 수줍게 하부장 한켠에 있는 듯 없는 듯 있으니, 이보다 겸손하면서 큰 일을 하는 이 또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