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인 0
귀양
유배, 귀양, 귀향은 같은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이 형벌을 받게 되면, 머나먼 오지로 떠나야 했다. 유배는 큰 시련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자기완성의 시간이 되었다.
귀양은 고려시대의 귀향이 원래 말이다. 이것은 죄를 지은 자들을 고향에 돌려보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발음이 변해 귀양이 되었다. 죄인을 먼 변방이나, 외딴섬에 보내어 살게 했던 유배와 같다.
조선시대에는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거리의 등급을 결정했는데 2천리(800km), 2천 5백리(1,000km), 3천리(1,200km) 3가지 종류가 있었다. 면적상으로는 한양에서 2천리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는데, 실제 이 거리를 채우기 위해 유배길을 여러 지역을 거치게 하는 방식으로 돌아갔다.
조선시대 3대 유배지는 제주도, 거제도, 흑산도다. 유배는 무기징역과 같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했던 심적 부담감이 컸던 형벌이었다.
반란 같은 큰 죄를 지어 유배를 간 경우도 있지만, 정치적인 음모에 희생되어 유배를 갔던 경우도 많았다. 왕이 다시 부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떠나지만 유배지로 가다가 죽기도 하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도 많았다.
조선시대 왕 자리에서 쫓겨난 단종은 영월, 연산군은 강화도, 광해군은 제주도로 갔다. 유배는 선비뿐만 아니라 왕족, 평민, 천민에 이르기까지 내려졌던 형벌이었다.
옛날 선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머나먼 곳에 유배되었지만, 공부에 정진해 후세에 귀감이 되는 업적을 이룬 분들도 많다. 산업화와 민주화 세대들이 나이의 허들을 넘기지 못하고, 회사에서 은퇴해 나오고 있다.
역사 속에서 귀양 갔던 분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앞으로 나의 삶의 방식에도 변화를 주고 싶어서 이 주제를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