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02
앤디 워홀 (1828 ~ 1987)
흰머리는 머리 염색이 아니라, 색소 결핍증의 결과였다. 남들에게 튀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 못 할 지병을 가졌다. 유럽에 대항하는 미국의 국가대표 팝 아티스트로 살았다. 부담감 때문인지, 팝 아티스트로서 활동기간은 짧았다.
“희귀한 것만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흔한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앤디 워홀은 미국 현대미술의 기린아 잭슨 폴록이 1956년 교통사고로 죽은 뒤, 등장했다. 그는 수작업으로 그리는 미술가가 아니라, 실크 스크린 프린팅으로 판화처럼 대량의 그림을 생산하는 방식을 고집했다. 주제는 코카콜라, 켐벨 수프 등 1960~70년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대에 양산되는 대중적 이미지를 모티브로 했다. 그는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였다.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3명의 연작 시리즈를 발표했다. 이들은 모든 미국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죽음과 고통을 맛본 사람들이기도 했다. 화려한 연작 안에 그녀들의 슬픔이 간직되어 있다. 그는 가난한 체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색소 결핍증으로, 어릴 때부터 피부색과 머리 색깔이 하얗게 되는 질병을 가지고 있었다.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 상업디자인을 전공했고, 10년간 광고 기획사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1962년 자신의 예술세계를 만들기 위해 팝 아트에 들어섰다. 팩토리(작업실)를 만들어 놓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 교류했다. 그의 기행들도 상당 부분 이 팩토리를 거쳤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알려졌다. 나는 먼로와 마오 작품을 미국 IR시 면담하던 기관투자가의 사무실에서, 직접 설명 듣고 감상했던 적이 있다.
그가 팝 아티스트로서 왕성하게 활동한 것은 불과 4~5년이다. 이후에는 인터뷰라는 잡지를 발간했고,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했다. 1882년 TV 방송 프로그램도 운영했는데, 대본 없이 진행되는 토크쇼였다. 유럽이 인상파, 초현실주의 등 현대미술의 꽃을 피울 무렵, 미국은 초고층 빌딩과 도로만 만들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페기 구겐하임이 유럽의 현대미술을 소개할 때, 미국을 대표하는 대항마가 필요했다. 이때 그가 나타났다.
독특한 그의 미술 세계관은 시대가 만들어냈고, 미국 스타일의 작가로 거듭났다. 자신을 언론에 교묘하게 PR 할 줄 알았던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닭 벼슬 모양의 자화상은 묘한 분위기로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팝아트에 대한 그의 정의다. “그 시대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아마 미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