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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만사 - 필 나이트

경영자 17

by 구포국수

필 나이트 (1958 ~ )

필 나이트가 육상선수로 칼 루이스처럼 뛰어났더라면, 나이키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멕시코공장의 신발 생산이 임박하지 않았다면, 스우시 마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신발공장이 없었다면 품질을 담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 운동화 시장을 양분하는 것은 미국의 나이키와 독일의 아디다스다. 미국의 나이키는 일본 운동화의 수입 및 판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는 미국 오레곤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레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며, 육상선수로 활동했다. 정작 육상선수로서는 뛰어난 성적을 내지 못해 현역 선수를 관두고, 스탠퍼드 대학 MBA 과정을 1962년에 마쳤다.


그는 졸업 후 세계일주를 할 때, 우연히 일본 고베에서 오니츠카 타이거(현재의 아식스) 러닝화를 발견한다. 신발의 품질과 저렴한 가격에 매료되어 오니츠카 사장을 만났고, 타이거의 미국 서부지역 배급권을 확보했다. 미국에 돌아와 첫 타이거 제품을 받기까지 무려 1년이 걸렸다.


제품이 도착했을 때 그는 두 켤레를 오레곤 대학 육상 코치였던 바우먼에게 보냈다. 바우먼은 필 나이트에게 제품 디자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로 하면서, 두 사람은 1964년 블루리본 스포츠(나이키 전신)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그리고, 차에 타이거 신발을 싣고 다니면서 팔기 시작했다.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오니츠카의 무리한 요구(블루리본 지분 51% 이전 요구 등)에 따라, 필 나이트는 수입판매에서 독립했다.


1971년 승리의 여신을 모티브로 한 나이키 브랜드를 만들었고, 스우시 로고도 이때 만들었다. 스우시 로고는 한 대학원생 디자이너에게서 제안받았다. 필 나이트는 당시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멕시코 공장에서 제품 생산이 임박해 로고로 채택했다.


현재 스우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로고이다. 1983년 필 나이트는 감사의 마음으로 로고 디자이너에게, 약 1백만불의 나이키 주식과 나이키 황금반지를 선물했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 책꽂이에는 파란색 스우시를 장착한 가죽 나이키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대학 입학기념으로 집에서 사준 것인데, 너무 소중해 기숙사 바닥에 내려놓지 못하고 그렇게 보관했다. 당시 내 가보 1호였다. 가끔 미팅이 있을 때만 꺼내 신을 정도였으니, 나의 나이키 운동화에 대한 기억은 자부심 그 자체였다.


아들은 운동화 수집을 좋아한다. 가격이 비싼 한정판 신발도 제법 있다. 추첨을 통해 어렵게 구매했는데, 돈이 필요할 때는 또 미련 없이 내다 팔기도 한다. 투자처와 같이 나이키 신발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신발공장이 가장 발달했던 곳은, 내 고향 부산 구포 옆에 있던 사상 공단이었다. 태광 등 우리나라 나이키 ODM 공장들이 이제 대부분 주력 생산공장들을 베트남 등으로 옮긴 지 오래되었다. 나이키는 사상 공단에서 OEM으로 만들어지던 운동화였다.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가 나이키 신발을 신으면서 애플처럼 제조공장 없는 나이키 스포츠 회사가 되었다. 나와 인연이 많은 브랜드여서, 나는 아디다스 보다는 나이키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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