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논문을 쓰다가 깨달은 사실
1년, 아니 9개월짜리 영국 석사과정 시작과 동시에 쏟아진 과제들:
수업, 매주 과제, 박사 지원… 그리고 졸업 논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기도 전에 과에서 메일이 왔다. 한 달 안에 주제와 슈퍼바이저를 정하고, 논문 초록을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석사 첫 주, 나는 교수님들께 연락을 돌리고, 정신없이 논문 미팅을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내 졸업 논문 주제가 정해졌다.
‘Generalized Global Symmetry (일반화된 광역 대칭변환)’
내 슈퍼바이저는 열정이 넘치는 분이셨다. 주제가 정해지자마자, 끝도 없는 참고자료 리스트가 날아왔다.
나는 아직 입문서 첫 페이지에서 헤매고 있었는데, “이건 이번 학회에서 막 발표된 주제야” 하면서 최신 논문 링크가 또 도착했다.
나는 갓 학사 졸업생인데, 주제는 최신 연구의 최전선이었다. 당시 내 머리에는 1930년대 폴 디랙이 만든 양자장론 소프트웨어까지만 깔려 있었다. (아니 다운로드하는 중이었다.) 업데이트가 한참 늦은 시스템으로 입자물리학의 최전선 논문을 돌리려다 보니, 연비가 급격히 떨어졌다.
나는 당중독에 빠졌다.
처음엔 논문을 프린트해 두고, 커피 마시며 읽었다.
며칠 뒤엔 논문을 열어두고, 디저트를 먹었다.
결국 논문은 테이블 매트가 되었고, 그 위엔 디저트가 놓였다.
그때 내가 특히 집착했던 디저트는, 스콘이었다.
1600년대부터 전통을 이어온 고풍스러운 카페의 스콘부터,
Sainsbury’s 마트에서 네 개 묶음으로 파는 가성비 스콘까지, 가리지 않고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스콘을 먹으려고 아침에 눈을 뜨는 지경에 이르렀다.
‘애착음식’.
유학생들에게 흔한 증상이었다.
불안, 외로움이 음식이라는 형태로 표출된 결과였다.
낯선 곳에서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또는 학업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이것만은 내 영역이야’ 하고 머물 수 있는 작은 안전지대를 설정하는 일이었다.
그게 사람일 수도 있고, 장르일 수도 있고 — 내 경우엔 스콘이었다.
그 안전지대 안에 머무를 수도 있고, 거길 기반 삼아 조금씩 외연을 넓혀갈 수도 있다.
나는 후자였다.
스콘이 좋아서, 스콘 맛집을 찾아 도시 외곽까지 나가봤고, 카페의 다른 음료도 시도해 봤고, 스콘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도 나눴다. 그 과정에서, 조금 더 영국이라는 나라와 가까워졌다.
지금 돌아보면, 스콘은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었다. 그건 타지에서의 생존 방식이었다.
다만, 내 애착이 하필 고칼로리 스콘이었다는 게... 건강엔 조금 안 좋았을 뿐.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 몸무게는 8kg 늘어나 있었다.
가져온 바지는 다 작아졌고, 옷장엔 입을 수 있는 옷이 없었다.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식습관을 손봐야 했다.
결국, 내 의지로 고친 건 아니었다. 내 의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 — 영국 수리물리학 석사 커리큘럼이, 내 식습관을 한 번 망쳐놓았다가, 다시 도로 고쳐놓았다.
2학기 말에 접어드니, 디저트를 따로 챙겨 먹을 여유조차 없었다.
공부 중간에 빠르게 먹을 수 있는, 효율적인 음식이 필요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디저트를 끊게 되었고, 대신 그보다 건강하고, 구하기 쉬운 음식에 집착하게 됐다.
그렇게 정착한 나의 애착 음식은, 샌드위치였다.
시간표가 거의 같았던 같은 과 친구 M과는, 요일마다 학과 근처의 샌드위치 가게들을 순례하듯 돌았다.
월요일은 치킨페스토 바게트,
화요일은 연어 베이글,
수요일은 파니니.
목요일은 바빠서 학과 안에서 파는 식빵 샌드위치로 대충 때우고,
금요일은 좀 멀리까지 걸어가 토마토 치즈 사워도우 샌드위치를 먹었다.
살은 빠졌지만... 이게 과연 ‘건강한 식습관’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M도, 어딘가 찝찝했는지 말을 꺼냈다.
“요즘 매일 샌드위치만 먹고살아...”
내가 답했다.
“근데 말이야, 그걸 다 같은 이름으로 묶는 게 좀 억울하지 않아? 형식만 비슷하지, 우리가 일주일 동안 먹은 샌드위치들은 재료가 다 달랐잖아.”
M이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디까지 샌드위치로 쳐? 난 브리또도 포함된다고 봐. 재료를 탄수화물이 감싸고 있으면, 그건 다 샌드위치야.”
“그럼... 깔조네는? 오픈 샌드위치는 샌드위치가 아닌 거야? 만두는? 그것도 재료를 감쌌잖아.”
M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네 논문 주제 같은 거지. 샌드위치를 어디까지 일반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
“아! 그러네. 그럼 스콘도, 반 갈라서 안에 크림이랑 잼 넣어 먹으면... 사실상 일반화된 샌드위치였어!”
나는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돌이켜보면,
공부도, 관계도, 문화적 적응도, 심지어는 졸업 논문 까지도....
유학생활 전체가, 그때 그때 주어진 재료들을 내 방식대로 쌓아 올려 만든, 일반화된 샌드위치였다.
이제 내 애착 음식은 샌드위치다.
세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음식.
마땅한 샌드위치 가게가 없다면 직접 만들면 되고,
그조차 어렵다면 아무 음식이나 사 먹고
“이 또한 일반화된 샌드위치다.” — 그렇게 넘기면 되는,
아주 편리한 애착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