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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는 원래 해답지가 없어요

먼저 내 빈틈부터 소개합니다

by 수지

“우주에는 원래 해답지가 없어요. 그 사실에 익숙해지세요. ”

(“Our universe does not have a solution sheet. We want you to get used to it")

기출문제 답안지 공개를 요구하던 학생들에게, 물리학과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사실 나는 늘 답을 갖고 있는 쪽이었다.

아니, '답이라고 믿을 수 있는 무언가'를 손에 꼭 쥐고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처음 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는 친구 사귀기 '해답지'를 발견했다.

친구들이 어려워하는 수학이나 물리 문제를 먼저 풀어두고,

매번 귀찮은 내색 없이 설명해 주는 것.

사교성이 없어도 괜찮았다.

학기 초에 조용히 '문제 잘 푼다'는 인상만 심어두면, 누군가 먼저 다가와 도움을 청했고, 그렇게 친구가 생겼다.

나는 언제나 '도와주는 사람'이면 됐다.


이 믿음에 힘을 더해준 건, 다름 아닌 대학교 'Effective Communication for Physicist(물리학자를 위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수업 교수님이었다.

첫 시간에 이렇게 말하셨다.

"이 방 안에서 이론물리학자가 될 사람은 많아야 2~3명입니다. 나머지는 커뮤니케이션 과목을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꼭 그 2~3명 안에 들어야지. 커뮤니케이션보다 물리학을 더 열심히 하자."

그렇게 '말보단 실력'이라는 생각으로 달렸고, 결국 이론물리학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런데 석사과정에서는 더 이상 내 '해답지'가 통하지 않았다.


첫 학기엔, 매주 숙제 제출이 있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스터디 그룹을 결성했고, 모이기만 하면 문제를 함께 풀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그 무리에 끼지 못했다. 아니, 끼고 싶지 않았다.

내 풀이는 늘 빈틈 투성이었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답지였다.

매주 혼자 끙끙댔다. 그리고 곧 뒤처졌다.


어찌저찌 첫 학기를 넘기고,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됐다.

문제는 더 어려워졌고, 혼자서는 도무지 풀 수가 없었다.

결국 ‘주워듣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스터디 모임에 나갔다.


그런데 그곳도 구멍이 많았다.

사실, 과에서 손꼽히는 천재들이 모인 그룹은 부담스러워서, 늘 나처럼 강의실에서 공허한 표정을 짓던 친구가 나가는 모임을 골랐다.

그 날 우리가 각자 들고 온 풀이는 거의 파편이나 다름 없었다.

“결론에 도달하긴 했는데, 왜 맞는지 모르겠어.”

분명 문제랑 관련은 있는 수식인데, 대체 다른 조건들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모르겠는 조각들.

그 때 누군가가 말했다.

“어… 이 교과서에 이런 조건이 있었는데, 그거 붙이면 말이 되겠는데?”

세 시간 내내, 우리는 서로의 풀이에 있는 구멍을 메워줬다. 길을 잃은 조각들이 대화를 통해 결국 하나의 완성된 풀이로 이어붙여졌다.

그 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이론물리학은 실험이 없는 대신, 토론을 통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그 말이, 처음으로 실감 났다.

그 날 모임이 끝난 후 친구가 말했다.

"나보다 훨씬 똑똑한 애들이랑 공부할 때 보다, 너네랑 같이 헤메는게 더 많이 배우는 것 같아. 앞으로도 같이 공부하자"


친구 사귀기에도, 물리 문제를 푸는데도, 우주를 이해하는 데에도 '해답지'는 없었다.

해답지 없는 우주를 살아가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내 빈틈부터 꺼내놓는 일이었다.

그 틈으로 함께 헤매 줄 동료도, 내 구멍을 메워줄 지식도 스며들거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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