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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쓰다, 러너스 하이

어떻게든 졸업했다.

by 수지

‘아니…무슨 내가 학위가 세 개쯤 있는 줄 아는 건가…’

'일반화된 광역 대칭변환' 논문을 펼칠 때마다, 매번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석사 논문 슈퍼바이저가 '읽기 쉽다'며 추천한 자료였지만, 첫 챕터부터 수학 범주론, 끈이론, 게이지이론 등 온갖 분야의 전문 용어들이 얽혀있었다.


쭉쭉 읽어나가도 모자랄 판에, 매 문장마다 두세 개씩 허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허들에 자꾸만 걸려 넘어졌다.

‘그 개념들을 다 몰라도,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지장은 없을 거예요’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데드라인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졌다.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당장 그 개념들을 하나씩, 제대로 이해하며 넘어가야만 할 것만 같았다.

몇 번이고 그러다가 지쳐서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 거야. 내일이나 모레쯤에 보면 술술 읽힐 거야'

논문을 덮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하던 변명이었다.

그렇게 '집중력이 가장 좋은 날'을 기다리다가, 어느새 3월, 봄방학이 시작됐다.

논문 제출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내 논문이 그렇게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같은 과에는 이미 한참 앞서 나간 친구가 있었다.

나랑 비슷한 주제를 선택했고, 수업도 대부분 겹쳐 자주 마주쳤다.

학부 2학년 때부터 이미,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끈이론 개념서를 독학해 왔다는 친구였다.

같은 자료를 읽고도, 늘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2학기 말, 학과 모임에서 그 친구를 다시 마주쳤다.

“논문은 잘 돼가?” — 의례적인 인사였는데,

“아니, 완전 막혔지.” —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얼마나 썼는데?” 내심 기대하며 물었다.

“일단 완성은 했는데, 교수님이 시킨 추가 계산 중 하나를 아직 못했어. 아마 빠질 것 같아.”

“….”

그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말해야 할까?’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정도 난이도도 못 버틴다면, 어쩌면 내 길이 아닌 걸지도...’

불안감에 휩싸일 때마다, 나만의 방식으로 불안을 달래야 했다.

바로, 분노의 러닝.

고등학교 때부터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였던 러닝 실력이, 석사 과정에 접어들며 눈에 띄게 늘었다.

학업 스트레스가 달리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그 기세를 몰아, 10K 러닝 대회도 신청했다.

학부 시절, 발목 부상으로 완주하지 못했던 10K 대회. 이번엔 기필코 완주 메달을 받고 싶었다.

욕심을 좀 내자면, 한 시간 안에 완주하고 싶었다. 당시 페이스를 보면 무리한 목표는 아니었다.

늘 그랬듯, 충분한 ‘분노 에너지’만 충전돼 있으면 됐다.

그리고 그건, 석사 재학 중엔 늘 넉넉히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이었다.



5월 14일 대회 당일.


"오늘은 도저히 못 뛸 것 같다…"

핑계는 차고 넘쳤다.

생리 예정일 하루 전이라 몸이 무거웠고,

날씨는 유난히 덥고 습했다.

게다가 전날엔 새벽까지 과제를 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 뛰면 분명 한 시간 안에 완주할 수 있을 텐데….’

느릿한 페이스로 고통스럽게 달리느니, 대회를 포기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응원하겠다며 대회장에 따라 나온 친구들이 보고 있었고, 참가비도 이미 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꼭 그날 뛰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하자마자 몸이 삐걱거렸다.

마치 오랜만에 뛰는 것처럼, 전혀 리듬이 맞지 않고 몸이 따로 놀았다.

이대로라면 10km는 커녕 5km도 뛰지 못할 것 같았다.


‘너무 힘들면 그냥 중간부터 걷자. 결승선만 통과하면 되는 거잖아...’

이 말을 되뇌며 무거운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렇게 3km를 지났다.

타이밍이 어긋났던 두 다리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리듬을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호흡도, 팔도, 몸통도 리듬에 맞춰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뒤에서 밀어주는 것처럼, 몸 전체가 균형을 찾았다.


불과 20분 전, ‘오늘은 못 뛸 것 같다’ 던 내가 무색할 만큼 몸이 가벼웠다.

하프 마라톤도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달려, 결국 결승선을 통과했다.

62분.

전체 순위로 보면 4000명 중 약 3000등. 목표인 60분보다 오래 걸린 건 아쉬웠지만,

나는 어떻게든 완주했고, 3년 만에 완주 메달을 손에 넣었다.

아침에 들었던 막막함에 비하면, 그 자체로 큰 성취였다.


달리기 전엔, 결승선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결국 결승선은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 미뤄두었던 다음 경주를 완주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날 저녁,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논문 파일을 열었다.

앞으로 일주일은 ‘논문 폐인’ 모드로 살기로 했다.

당장 큰 그림이 보이지 않아도, 포기하고 싶어도, 일단 이 일주일만큼은 논문만 생각하기로 했다.


역시 처음엔 쉽지 않았다.

모르는 개념들 앞에서 집중력이 뚝뚝 끊겼다. 논문을 덮고 유튜브로 도망치고 싶은 유혹도 계속됐다.

마음을 다잡았다.

마치, 러닝 초반 2km처럼, 천천히 리듬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집, 도서관, 카페를 셔틀버스처럼 오가며,

눈 뜨자마자 읽고, 생각하고, 쓰고, 자기 직전까지 또 읽고, 또 썼다.


제출 이틀 전.
카페 구석에 앉아,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여러 수식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한 가지 문제에 이렇게 오랫동안, 오롯이 집중하고 있다니.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 듣고 보는 모든 정보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했다.

분명 몸은 지쳤는데, 머리는 또렷했다.

아니, 머리 전체는 흐릿한데,

그 문제에 할당된 뇌의 한 구석만 또렷하게 깨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상태라면, 평생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문제를 붙들고 오래 고민하며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논문 버전의 러너스 하이였다.


그렇게 완성한 초안을 슈퍼바이저에게 보냈다.

아직은 구멍이 많았고, 다른 친구들의 논문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서론부터 결말까지, 처음으로 완주한 한 편의 논문이었다.


3주 뒤.

논문 최종 제출 확인 메일을 받았다.

그 짧은 메일 한 통이, 완주 메달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결과는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지금도 누군가 '일반화된 광역대칭변환'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라고 하면, 말문이 막힌다.

그래도 나는 석사과정을, 내 방식대로 완주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중요한 과제를 앞두고 몸도, 마음도 늘 브레이크를 걸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지금은 마음이 복잡해서.”

언제나 '완벽한 날'이 오길 기다리며, 시작을 미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룰수록 완벽한 날은 더 오지 않았다.

사실, 시작하기에 ‘완벽한 날’이란 건 애초에 없었다.

어딘가 부족한 상태라도, 일단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면

몸과 마음은 서서히 거기에 맞춰 리듬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날 할 수 있는 만큼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러너스 하이도, 몰입의 쾌감도 따라왔다.








발목 부상으로 완주하지 못했던 10K 대회:

https://brunch.co.kr/@7401a069bda44c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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