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원생의 일기
2022년 12월,
오랜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돌아온 밤.
꽤 오랜만이었다. 오래된 사이인데도 사는 곳들이 흩어지고 각자 하는 일이 생기니 어릴 때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게 됐다. 그러던 중에 어렵게 어렵게 날을 맞췄다.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 놀고 웃고 떠들고 먹고 자고 하니 그 애 생각이 났다. 즐거운 가운데 빈자리가 선명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몸도 마음도 피곤해서 괜히 더 생각하게 되고 우울해졌다. 아프고 자존심 상하는 진실이다. 그 애는 우리를 떠났다. 오래 앓은 적도 없는 생니가 갑자기 쑥 빠져버렸다.
말로만 듣던 '손절'을 당한 셈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유행처럼 손절하고 손절당하는데 나는 설마 나도 그렇게 명시적이고 유치한 형태의 이별을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먹고 살기 바쁘다고 한동안 잠수타듯 연락 안 하고 안 받고 지냈더니 상황이 다 종료되고 난 후 뒤늦게서야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떠났단다. 얼마 전에 우리 중 한 명과 무슨 일을 같이 하다 갈등을 빚었는데 이젠 우릴 볼 때마다 그 갈등이 생각날 것 같다며 그럴 바엔 그냥 너희 모두를 내 인생에서 지우겠노라 선언한 뒤 연락이 두절됐단다.
어느 날 과정부터 결과까지를 10분 내에 설명받은 나로서는 소화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러나 일단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야 했다. 얼떨떨하게 앉아있는 감정들을 채찍질해서 일으켰다. 그러자 정말로 그 감정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언젠간 그럴 줄 알았다"고 냉소했고 그다음엔 "그래도 어쩜 그럴 수가 있냐"며 화를 냈다. 하지만 이내 슬퍼졌다. 사건을 논리적으로 파헤치고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라든지 누구의 잘못인가 따위를 따지는 건 사실 전혀 중요치 않다. 나는 배신당한 것도, 패배한 것도 아니고 상실을 했다. 아끼고 좋아하던 것을 잃어버렸다.
슬퍼하는 대신 차라리 화를 내고 싶었지만 감정이 다른 감정으로 막아지진 않는다.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원망스럽고 속상하다. 어떻게 그렇게 단숨에 떠날 수 있었을까? 걔가 그동안 혼자 속으로 무슨 생각들을 해왔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사이가 이렇게 파탄날 것에 대한 전조는 전혀 없었다. 어딜 가든 우리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소개하고, 늘 우리랑 더 많이 놀고 싶어 하고, 과거로 돌아가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더라도 우릴 한 명 한 명 다시 찾겠다고 말하던 애였다. 우릴 좋아했으면서. 소중하게 생각했으면서. 나를 아꼈으면서....... 연락 한 통 없는 걸 보면 정말 한 점 후회조차 없나? 이제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게 됐다.
미웠지만 또 내 마음 한 켠은 이미 그 애를 이해하고 있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릴 좋아하고 친하게 지냈던 게 전부 다 거짓일 것 같진 않으니 그 애 역시 상실을 한 거다. 우리야 당했지만 걔는 제 손으로 잘라냈다. 그게 차라리 낫다고 판단할 만한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래서 자유로운 파랑새처럼 날려 보내주고도 싶었다. 하지만 한동안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애가 하루아침에 나를 떠났다고 해서 나 역시 하루아침에 걜 마음속에서 내쫓아버릴 순 없다. 웃긴 일이다. 걔는 이미 나갔는데 나는 내보내지 못한다니. 마치 내가 그 애 발목이라도 잡고 있는 양 미안해진다. 참 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잘못은 걔가 했지.
이번 여행은 언제나처럼 아주 즐거웠다. 별 것도 아닌 말에 나사 빠진 듯 웃었고 평범한 일도 같이 하니 알록달록한 색이 입혀졌다. 우리가 같이 있을 땐 늘 그래왔다. 그런데 딱 한번 그 애 얘기가 나왔을 땐 달던 술맛이 갑자기 씁쓸해졌다. 우리가 함께 즐거운 자리에 그 애가 없다니 낯선 일이었다. 다 같이 간 여행이 꽤 많았는데. 여행 한번 다녀오면 그때 있었던 얘길 질리도록 하고 또 하고, 그중 누군가가 뱉었던 별 거 아닌 말이 갑자기 유행어처럼 입에 붙어서는 아주 돌림노래를 불러대곤 했었다. 그 모든 바보짓을 다 함께하던 걔는 아마도 다신 없을 거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묵었던 호텔의 침대와 침구가 좋기는 훨씬 좋을 텐데. 고생 좀 하고 오면 집이 새삼스럽게 소중해지는 법이다. 누워서 편지들을 하나하나 펼쳐 읽었다. 이번 여행에선 연말을 맞아 서로 편지를 한 장씩 써 주고 받았다. 워낙 오래됐고 애틋하기보단 투박한 사이라 이런 짓은 또 처음이다. 글자들을 읽다 보니 내가 드러낸 적 없는 나까지도 속속들이 알아주는 마음들이 읽힌다. 나 좀 헤아려 달라고 외치지 않아도, 나를 아끼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를 오래 들여다봐 준다. 말하지 않는 것들도 알아준다. 오해받는 것 같아도, 무시되는 것 같아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아도 실은 알아주고 있다.
더 잘 지내기로 마음먹는다. 마침 하나가 쏙 빠져나간 뒤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다니 공교롭다. 이게 세상 사는 요령인 듯도 싶다. 잃어버린 것은 이전에 얼마나 이뻐했든지 간에 냉큼 에라, 안 그래도 버리고 싶었다, 해버리고 남은 것들을 한층 더 귀하게 여기는 거다. 서로를 확 떠나버리고 싶을 만큼 아팠던 적이 우리라고 없었을까. 우리도 그 애처럼 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참고 견디고 서로의 곁에 있어준 것 아닌가. 어쩌면 우리 중 네가 유독 아팠을지도 모르지만 말없이 갔으니 이젠 영영 모르게 됐지.
잘 지내야지. 앞으로도 또 찾아올 겨울마다 함께 살을 붙이고 잘 이겨내야지. 그러나 이번 겨울만큼은, 아무래도 각자도생 해야겠지. 이 생채기는 모두에게 닿아 있어서 내가 뒤척이는 것만으로 다른 애들도 성가시게 만들 테니까. 좀 쓰라려도 그냥 묵묵히 참아봐야지. 그리고 적어도 같은 실수만은 하지 않도록 더 노력해야겠지. 그 애 마음은 다 알아주지 못했어도 다른 애들 건 알아줄 수 있게. 이번엔 실패했어도 다음엔 실패하지 않게.
슬픔은 상실로 인한 감정이라고들 한다. 나는 그 애가 떠나서 슬프고 걔가 우릴 떠나기로 마음먹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가슴 아프다. 어쩔 수 없이 상처 입었다. 그래도 걔가 내게 손해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린 만나려고 만났지 아름답게 헤어지려고 만났던 건 아니니까. 걔가 아무리 매정하게 날랐어도 함께했던 순간들까지 다 싸들고 가진 못했다. 남은 추억으로는 마지막 상처를 덮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네가 우리한테 한 모든 짓은 그렇게 나쁜 짓은 아니었어. 너는 손절하는 마음으로 갔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한텐 익절이었지. 그러니 잘 가라, 파랑새야. 날아가다가 다치지 말고 뒤 돌아보지도 말고 잘 살렴. 창문을 잽싸게 닫는다. 다른 뜻은 아니고, 찬 바람 들까 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