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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캄페체에서 떡볶이를 외치다

한국 음식 찾기 원정대

by ElenaLee


한국 음식은 그림의 떡



2022년, 우리가 처음 캄페체에 정착했을 때, 이곳에서 한국 식재료를 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외국만 나가면 없던 애국심도 살아나는 건지, 평소에는 쳐다도 안 보던 김치에 목숨을 거는 스타일인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현실이었다.


특히 나의 ‘소울푸드’인 떡볶이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 매콤 달콤한 양념에 쫀득한 떡을 한입 베어 물면 세상 모든 시름이 잊힐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떡은커녕 흔한 고춧가루조차 구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초기 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국기원 사범님 가족이 멕시코시티에서 가져온 귀한 김치와 무, 그리고 꿈에 그리던 떡볶이 떡을 조금 나눠주셨다. 그때 그 떡을 받아 들었을 때의 감격이란! 마치 황금보다 더 귀한 것을 손에 쥔 기분이었다. 돈이 있어도 캄페체에서는 살 수 없는 것이었기에, 나는 그 떡 한 봉지를 금은보화 다루듯 조심스럽게 받아와, 한 번 먹을 분량씩 소중하게 나누어 냉동실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아이들 몰래 혼자 아껴 먹을 요량이었다.


20년 전 캐나다에서 잠깐 살았을 때, 그때는 적어도 슈퍼에 가면 배추나 무 정도는 쉽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 캄페체에서는 배추는커녕 흔한 한국 라면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월마트에서 항상 라면이 있을 법할 곳을 항상 쳐다보며 한국물건 비슷한 게 있으려나 항상 찾아보았다. 어쩌다 마트 구석에서 불닭볶음면이나 오뚜기 라면이 나타나면 보물이라도 찾은 듯 기뻐하던 시절이었다.



메리다 원정기: 코스트코에서 만난 김과 만두



우리 가족이 한국 음식을 못 찾아 힘들어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국기원 가족이 메리다(Mérida)에 있는 코스트코에 가면 김이나 쌀, 그리고 몇 가지 한국 양념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주셨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마치 독립투사라도 된 양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무엇을 살지 꼼꼼히 목록을 작성하고, 1박 2일 코스로 호텔까지 예약하며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캄페체에서 2시간 거리의 메리다로 아침 일찍 출발하던 날, 차 안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처음 도착한 메리다는 캄페체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조금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였다. (물론 캄페체와 비교해서 말이다.) 코스트코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조미김과 냉동 코너의 비비고 만두를 발견하고는 큰아이와 내가 거의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근처 아시안 마트에서는 미림과 간장 등 그리웠던 양념들도 몇 가지 구할 수 있었다.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이 다 있지는 않았지만, 이만큼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며 감지덕지했다.


한국에서는 이마트만 가도 수십 종류의 간장과 고추장 중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며 하나를 고르는 것이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일이었는데, 캄페체에서는 두 시간을 운전해 가서 겨우 하나 있는 간장(그나마도 가끔은 유통기한이 임박한)을 ‘고맙습니다’ 하고 모셔와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한 달의 기다림 '천사 택배', 그리고 눈물의 깻잎 농사



시간이 흘러 내가 캄페체를 떠나올 무렵인 2024년경에는, 이곳 대형 마트에서도 두부나 숙주나물을 파는 등 (내 기준에서는) 그야말로 일취월장한 발전을 보여주긴 했지만, 처음 정착했을 당시 한국 음식 구하기는 정말이지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가끔씩 멕시코시티에서 한인들을 상대로 장사하시는 분이 커다란 봉고차에 주문받은 물품들을 가득 싣고 한두 달에 한 번씩 우리 집 근처에 들러주시곤 했다. 그분은 여러 도시를 거쳐 오시느라 항상 지쳐 보였고, 차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도 나는 미리 주문해 둔 라면, 떡볶이 떡, 쌀, 심지어 초코파이 같은 과자들을 건네받을 때면 그분이 정말 천사처럼 느껴졌다. 특히 아이들은 평소 구경도 못 하던 한국 아이스크림(비록 두 배가 넘는 가격을 지불해야 했지만)이나 막내가 좋아하는 뽀로로 음료수 한 박스를 받아 들고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다.


한 번은 이삿짐에 실려 온 깻잎 씨앗을 발견하고는, 이걸 키워보겠다며 월마트에서 흙과 화분을 사 와 정성껏 씨앗을 뿌린 적도 있었다. 네이버 블로그를 밤새 뒤져가며 외국에서 깻잎 농사에 성공한 사람들의 후기를 부러움 반, 기대 반으로 정독했다. ‘나도 저렇게 푸릇푸릇한 깻잎을 식탁에 올릴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화분만 들여다보며 깻잎 새싹이 돋아나기를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한 달이 넘도록 화분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멕시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나의 깻잎 농사 꿈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고, 어찌나 아쉽고 서운하던지.



뜻밖의 다이어트, 그리고 경지에 오른 현지화 레시피



이런 식량난(?) 덕분에 예상치 못한 효과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통통한 편이었고 먹는 것을 유독 좋아했던 큰아이가 멕시코에 와서 살이 제법 빠진 것이다. 먹을 것이 마땅치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물론 나중에는 현지 음식에 완벽히 적응해 다시 예전의 몸무게를 회복했지만 말이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멕시코 캄페체에서, 특히 한국 음식을 해 먹고사는 것은 여간 번거롭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했던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였다. 깻잎은 끝내 못 먹었지만, 어느새 나는 파만 가지고도 그럴싸한 김치를 담그고 있었고, 월마트에서 파는 평범한 채소와 고기만으로도 제법 다양한 한국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해 있었다. 거기다 카레가루를 넣은 치킨타코등 국적불명의 음식은 물론 등갈비나 돼지갈비등 한국에서는 엄두도 못 내던 요리를 블로그나 유튜브를 보며 쓱싹 해내고 치킨을 튀기는 일 따위는 식은 죽 먹기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렇게 캄페체에서의 식생활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결국 낯선 땅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렇듯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해 나만의 방식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매일의 밥상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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