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는 떠나고 싶었고 나는 머물고 싶었다.

by ElenaLee


끝나지 않은 폭풍: 남편의 회사, 그리고 '빨래 대란'의 진실



지난번 ‘일생일대의 싸움’이 있고 난 후, 나는 여전히 내 감정에만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남편이 그날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왜 회사 일로 바쁘다며 집안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그 사달을 만들었는지, 나는 그저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남편은 회사에서 정말이지 거대한 폭풍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남편은 캄페체에 오자마자 스페인어도 모르는 상태에서 드넓은 농장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멕시코인 농장 관리자들을 독려하고 새로운 구역에 농작물을 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중역들이 농장 방문 시, 혹은 사진 보고를 통해 텅 비었던 땅에 농작물이 빼곡히 들어서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남편의 노고를 치하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 뒤에 숨겨진 그림자, 그리고 땡볕 아래에서의 사투



그런데 문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대와는 달리 농장의 생산성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고, 예측 불가능한 문제들이 계속 그의 발목을 잡았다. 남편은 문제 해결을 위해 살인적인 땡볕 아래서 현장 사람들과 씨름하며 거의 매일을 보냈다. 지난번 나에게 "회사 일이 바빴다"며 쌓인 빨랫더미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무언가 심각한 문제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저 회사에서 일어난 문제이고 곧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 일이 그의 미래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었는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무너진 계획, 멀어진 꿈: 남편의 절망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사 상부의 인사이동까지 겹치면서, 그의 입지는 회사 내에서 더욱 불안해졌고 미국행에 대한 희미한 희망도 점차 사라져 갔다. 그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른 농장을 알아보는 등 동분서주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이 농장 관리 업무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며 힘들어하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문제까지 터져버렸으니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가족을 데리고 머나먼 타국까지 와서 온갖 고생은 다 시키는 것 같은데, 정작 가장으로서 자신의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거기에 아내는 매일같이 투정만 부리고 있으니, 그는 정말이지 사면초가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그 순간에도 나 힘든 것만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엇갈리는 마음: 그는 떠나고 싶었고, 나는 머물고 싶었다



그때부터 남편은 진심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이곳 캄페체에서 5년이고 10년이고 있으면서 농장 관리자로 커리어를 쌓는 것은 자신의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하고 좋아했던, 원래 한국에서 하던 그 분야의 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히 말했다.


나는 남편의 일이 정확히 어떤 어려움에 봉착했는지, 그가 말하는 ‘미래가 안 보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회사 문제이니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이곳 생활 3년 차에 접어들어 이제 제법 스페인어도 유창해지고 있었고, 나 역시 나름대로 이곳 생활에 적응하며 어떻게 캄페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법 알게 되었고 디나와 같은 좋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물론 살인적인 더위와 여러 가지 한국과 다른 삶이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이제 조금씩 이곳에서의 어려운 삶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고 있었고, 그래서 남편만 마음을 바꿔 이 상황을 잘 헤쳐나가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언제나 그렇듯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