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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며 펑펑 우는 T

감정 이입하지 않는 사람

by 마싸

용의 몸을 하고 악마의 얼굴을 한 괴물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 괴물은 한 달에 한 번 결혼한 여성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고 그러지 않으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거라고 했다. 각 집에서 돌아가며 매달 제물을 바쳤다. 그 순서는 돌고 돌아 우리 집 차례가 되었다. 결혼한 여자는 엄마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제물이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명절에나 봤던 제사상 같은 게 차려져 있었다. 엄마는 흰 한복을 입고 그 상 앞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제물로 바쳐지는 날임을 알았다. 괴물이 나타났다. 괴물은 입으로 불을 뿜었다가 다시 빨아들였고, 엄마가 그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려 했다. 난 엉엉 울며 “엄마, 안 돼. 가지 마!”하며 빨려 가는 엄마를 붙잡았다. 괴물은 “내가 갈게. 나를 데려가”라며 소리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들숨으로 엄마를 빨아들였다. “엄마! 엄마!” 하며 울며 매달렸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지혜야, 일어나봐” 엄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꿈이었다. “무슨 꿈을 꿨길래 이리 우노.” 손으로 눈가를 만져보니 눈물이 흥건하게 만져졌다.



최근 MBTI가 유행하며 사람들의 성격이나 성향을 16가지로 구분 짓는다. 나는 검사를 하면 사고형과 감정형을 판별하는 T/F에서 사고형인 T가 나온다. T라고 하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공감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흔히 말한다. 나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남편도 내게 공감할 줄 모른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타인의 감정에 온전히 이입하는 아이였다. 그 첫 대상은 엄마였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무렵의 엄마는 늘 괴로웠다. 늘 화나 있었고 자신의 삶을 절망했다. 엄마가 슬퍼하면 나도 슬펐고, 엄마가 분노하면 나도 분노했으며, 엄마가 절망하면 나도 절망했다. 엄마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똑같이 느꼈다.



자기 몸을 스스로 해하면서까지 괴로워하는 엄마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몸부림을, 그 표정을,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괴물 꿈을 꾼 시기는 엄마가 어떤 형태로든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괴로워하는 엄마를 보며 이곳을 떠나 편안해졌으면 하는 마음과 나를 두고 떠나면 어떡하지 하는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난 엄마의 감정을 안은 덕에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늘 불안했고 늘 슬펐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더 이상 엄마의 감정을 받아주기가 힘들었다. 내가 당신의 감정을 그대로 흡수하는 아이임을 알면서 하수구에 쏟아버리듯 내게 감정을 버렸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무엇보다 나에게 샘솟는 감정을 감당하기도 벅찼기에 엄마의 감정까지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겉으로 반항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에 벽을 세워갔고, 엄마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은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감정에 절대 개입하지 않고, 동화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난 더욱 T스런 인간으로 변했고, 그렇게 살아가는 데 큰 불편함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감정 이입하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한 아이가 며칠 동안 아무도 안 볼 때 매일 배를 한 대씩 때렸다고 했다. 장난으로 그런 거 아니냐고 묻자 아니라고 하며 배가 많이 아팠다고 했다. 너무 놀라 심장이 터져나갈 듯 뛰었다. 아이에게 엄마가 선생님께 말하겠다고 진정시키고 재운 후 거실에 혼자 앉아 밤새 울었다.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 얼마나 굴욕적이었을지, 아이가 말하지도 않은 온갖 감정의 파도가 내 몸과 마음을 집어삼켰다.



다음 날 담임 선생님과 통화한 후 가벼운 해프닝이었던 것으로 끝났지만 감정 이입이 주는 불편한 느낌은 오래도록 남았다. 또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지나친 감정 이입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오늘도 나는 타인의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개입하지 않는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담담하게 대한다. 그러면서도 집으로 돌아와 편한 마음으로 드라마를 볼 때면 여지없이 펑펑 울고 만다. 난 공감 능력이 너무 뛰어나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T가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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