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생활 초창기, 감사할 것이 한국에서도 바빠서 잘 못해 먹던 집밥을 솜씨좋은 이모의 후한 밥상 인심 덕분에 매일같이 내 입이 호사를 누렸었다. 하지만 새로 이사간 알라모아나 콘도에선 다이아몬드헤드 민박처럼 더이상 누군가 나를 위해 밥상을 차려주는 일은 더이상 없었다. 그야 당연한게 어디에도 나의 식사를 포함한 계약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나를 위한 밥상은 이제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
매 끼니를 밖에서 사먹는단건 주머니 사정이 허락치 않았고, 또 미국 스타일의 음식들로 삼시세끼를 먹는 것도 체질상 힘든 일이니 이제부턴 정말 유학생 모드로 소박하게나마 내 손으로 내 밥상을 차려야 한다.
다행히 딱 집밥 수준이긴 해도 요리에 소질이 있는 편이다. 그동안은 이전 직장인 방송사 업무 환경 덕분에 늘 스트레스와 시간에 쫓기다보니 피곤하단 핑계로 주방을 멀리 했었지만, 그 와중에도 가끔씩 주말이면 남편과 가락도매시장을 누비며 농산물, 청과, 수산물 등 제철 식재료를 두 손 가득 장만하는데 이 순간이 내겐 여느 백화점 쇼핑보다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나름 환경이 주어지만 곧잘 요리하는 걸 즐기는 녀자랍니다.
하지만 여기 콘도로 이사오기 전까지 약 3주간은 딱히 마트에서 쇼핑한 것이 맥주캔이나 와인 정도였을까? 이제 기동력도 생겼으니 하와이 마트 탐험을 좀 해봐야 겠단 생각에 나름 기대도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세계 어딜 여행하건 그 나라 마트나 재래시장은 꼭 가보려고 하는 편이다.
로컬 문화를 체험하는데 장보기만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기 떄문이다. 이제 하와이에서 본격적인 나의 호기심 보따리를 펼쳐볼 차례.
한참 성시경의 브리치즈 파스타에 꽂혀 있을 시기에 바질, 토마토, 브리치즈를 사러 홀푸드 다녀온 날.
그러던 중 집주인 언니가 함께 마트에 장보러 가지 않겠냐는 반가운 말을 꺼낸다.
참고로 이사온 새 집의 주인은 나와 7살 차이나는 부산 사람이다. 벌써 30년 가까이 하와이에 산 교포지만, 집주인 언니는 사실 내 눈엔 딱! 부산 사람이었다. 스무살이 넘어 이주한 까닭이겠지만 부산 사투리와 그 특유의 억양을 여전히 익숙하게사용하는 것도 한몫했고, 더구나신기했던건 이곳에서 그토록 오래 살았는데도 어떻게 피부가 저렇게 뽀얄 수가 있지? 난 벌써 3주만에 깜시가 되었건만...
그도 그럴것이 언니의 하루 일과를 가만 보면, 매일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 1~2시간 하는 것 외엔 삼시세끼를 거의 집에서 해결하는 것 같았다. 그 덕분일까 언니는 관리하는 분답게 나이가 비껴간 동안에 몸매도 탄탄한 말그대로 베이글녀였다.
외출이라곤 잠시 마트 쇼핑이나 은행 업무 정도? 성격도 조용조용, 거실에서 TV를 볼 때도 이어폰을 끼고 외부에 소음을 남기지 않는 집순이 + 내향형의 스타일여서 나처럼 천방지축 ESFP적인 인간형에겐 다소 조심스러운 인물 유형이었다. 물론 이사후 몇일간 지켜본 나의 시선에서 말이지만!
이런 나의 관찰자 모드에서 보았을때 언니와 내가 잘 통할 만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집밥'이었다. 언니와 난 처음부터 한 상에서 밥을 먹거나 하는 분위기는 아녔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어학원 등교를 위해 아침 일찍 나가서 집에 돌아오는 시간도 그날그날 일정에 따라 늘 불규칙했으니 당연한 상황. 그러던 중 내가 집에 돌아와 사부작 밥상을 차리는 걸 본 언니가 오늘 한 음식이라며 맛보라고 주셨는데 웬걸, 너무나 내 입맛에 꼭 맞는 것이 아닌가!
매콤칼칼한 언니의 주특기들, 어찌 이 좋은 소재들을 앞에 두고 한잔 하지 않을수 있으리...
특히 오징어볶음, 골뱅이무침, 코다리조림 같은 매콤하고 칼칼하고 간이 제법 된 메뉴들은 언니의 주특기로 역시나 부산맛이랄까! 하와이에서 어찌 이런 식재료를 공수하나 싶을만큼 친숙한 메뉴들을 맛깔나게 만드는 금손이었다. 다시한번 느끼지만 난 참 먹을 복을 타고 난 사람같다.
게다가 이런 반찬앞에서 한잔 생각이 안날수 없지! 난 넉살좋게 넙죽넙죽 맛있게 언니의 반찬 나눔을 핑계로 반주 한잔 곁들이며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알고보니 언니는 '한 술' 하는 주당에 흥도 많고 사연도 많은 분이었다.
언니가 한식 장인이니, 난 양식 재질로 간단히 솜씨를 부려보는데...
최근 몇년간 언니의 가장 관심사는 '주역'이라 했다. 조용한 언니의 취미생활이 바로 사주, 역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고... 매일밤, 이어폰을 꽂고 시청하던 것도 바로 관련한 콘텐츠였다고 하니 조금이나마 언니의 캐릭터가 와닿는 것 같기도 했다.
가슴아프게도 언니는 십여년 전 정말 사랑했던 남편과 사별을 했다한다. 그 전에 하와이로 건너와 만난 첫 남편과는 금지옥엽 두 딸(이젠 둘 다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을 키우며 지내다 성격차이로 오래전 이혼을 하고 얼마뒤 언니 인생에 찾아온이 분과 열정적으로 서로 애틋하게 연애끝에 천생연분이 이런건가보다 느끼고 다시 결혼이란 큰 결심을 하게됐다고.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정말 예고없이 찾아온 형부의 병환으로 12월 어느날 남편과의 LA여행을 단 며칠 남겨두고 입원한지 사나흘만에 그렇게 황망하게 혼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속 깊은 각자의 히스토리를 나누며 함께 저녁을 하는 날엔 술이 꽤나 필요했다. 물론 누가 70년대생 아니랄까봐 유튜브에선 1990-2000년대 발라드가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노래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또 한잔을 부딪히며 우리의 밤은 그렇게 흐르고, 또 그렇게 우린 '집밥과 한잔'으로 둘도없는 식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정말 세상이 좁다고 느낀건 먼저 떠난 형부의 직장이 바로 내발로 찾아간 하와이 여행사 대표님의 회사였고, 그 형부의 절친이 또 얼마전 만난 에디터 출신의 하와이로 시집온 옛 직장선배의 남편이란 것. 알다가도 모를 것이 정말 인생인 듯 하다.
이렇게 둘의 콜라보로 집밥의 세계를 넓히는 동안 우리의 몸무게도 벽에 부딪히고 마는데...
다음편엔 우리가 틈나면 함께 집밥 재료를 공수하러 다닌 하와이 마트 이모저모를 소개해보려 한다.
코스트코 외에도 H마트, 돈키호테, 세이프웨이, 홀푸드, 월마트, 샘스클럽까지 각 마트별 필수 쇼핑 목록이 제법 많기에 발품 팔아 마련한 깨알같은 나의 쇼핑 정보를 나눔해보겠다.
휴버트 보스(Hubert Vos), 네덜란드 화가 / Study of Hawaiian Fish, 1898
호놀룰루 아트 뮤지엄의 하와이관에서 만난 이 작품은 사실적 묘사와 생동감있는 컬러로 기억에 남는다. 내가 스노클링으로 잠시 경험한 하와이 바닷속에서 볼 수 있는 생물들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작가를 검색하다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바로 네덜란드 태생의 작가 휴버트 보스가 하와이 왕조의 마지막 공주를 아내로 맞아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더 놀라운 것은 보스가 아시아에서 여러 사람들의 초상을 남기는 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 고종황제의 초상화를 그렸단 것. 1899년의 당시 서울풍경도 작품으로 남겼다하니 어찌 하와이에서 만난 이 그림으로 고종까지 넘어오게 되는건지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