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반찬가게에서의 플러팅

"만나볼래요?"

by 뽀득여사

6년 전부터 나는 매주 주말마다 친정엄마를 찾아뵙는다. 다리가 불편해지신 엄마를 돕기 위해서다. 그 사이 관심도 솜씨도 없던 반찬 만들기 덕분에, 몇 년 사이 음식 솜씨도 한 뼘쯤 늘었다. 이제는 레시피 없이도 어림짐작과 손맛으로 밑반찬 몇 가지는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늘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동네 반찬가게다. 게으른 마음이 들 때면 나는 냉장고 문 대신 반찬가게 문을 연다. 냉장고를 열고 고민하는 대신, 반찬가게 진열대 앞에서 ‘오늘은 어떤 반찬을 살까?’ 고민하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가을이 다가왔다. 유난히 가을을 타는 데다가 딸도 한 달 전 유학을 간 터라, 집에서 음식을 하는 것이 점점 귀찮게 느껴지던 요즘이었다. 주말을 하루 앞둔 금요일 아침, 나는 냉장고를 열지 않고 반찬가게로 향했다.



반찬가게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갓 만든 반찬들이 초록, 노랑, 주황, 검정… 다채로운 색으로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침이라 뚜껑도 덮이지 않은 반찬들에서는 색감과 냄새가 한층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공기 대부분을 차지하며, 코끝을 살짝 간지럽혔다.


늘 정갈하게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른 여자사장님이 계시던 곳인데, 오늘은 달랐다. 조리실에서 나온 낯선 중년 남자분이 반찬용기를 잔뜩 들고 나타난 것이다.


‘어… 사장님 어디 가셨지? 남편분인가, 친척분인가?’
그분은 어색하게 손을 허둥대며 진열대와 계산대를 오가고 있었다. 앞치마도 없이 셔츠 차림인 걸 보니 잠시 가게를 맡고 계신 듯했다. 익숙지 않은 폼으로 반찬 뚜껑을 하나씩 덮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진열대로 다가갔다. 참기름과 들기름으로 막 무쳐낸 나물들, 윤기 나는 멸치볶음, 노릇노릇 김치전, 붉은 양념의 오징어채, 알록달록 잡채, 반짝이는 마늘종볶음… 그중에서도 내 손은 초록빛 선명한 나물들로 향했다. 네 팩에 만원이라는 푯말도 마음을 가볍게 했다.



남자분은 여전히 말없이 반찬용기를 들었다 놓았다 반복했다.


“이거, 이거, 이거 그리고 이것으로 주세요.”
나는 천천히 손으로 정확히 네 개를 짚어 드렸다.


남자분은 말없이 네 개를 챙기고 카운터로 향했다.
내가 카드를 꺼내는 순간, 남자분이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볼래요?”


…네? 나는 순간 고개를 들었다.


“만… 만나볼래요?”


귀를 의심하며, 순간 나는 멸치꽁지처럼 뾰족해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네?”


남자분은 여전히 낮은 톤으로 웅얼거렸다.


“만나볼래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이게 무슨 당나귀 당근 씹는 소리인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남자분은 잠깐 당황한 듯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나는 얼굴이 순간 확 달아올랐다.


그러다 번쩍, 깨달았다.


‘아… 혹시… 반찬이 맞는지 확인해 보라는 말이었던 거구나.’


민망한 웃음을 참으며,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아, 혹시 제가 고른 반찬이 맞는지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시죠?”


남자분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뿔싸! 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가? 누워있던 고등어구이가 펄떡이며 지느러미를 치고 웃을 일이다.

얼른 웃음을 참으며 카드를 건넸고, 남자분은 어색하게 검정봉투에 반찬을 담았다. 나는 반찬봉투를 들고 문을 열며 거의 소리치듯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혼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얼마나 황당했을까. 고른 반찬이 맞는지 확인하려던 것뿐인데, 갑자기 ‘아니요!’라는 답을 들었으니. 가뜩이나 잠시 가게를 보고 있었던 듯싶은데, 졸지에 ‘반찬가게의 플러팅 남’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나볼래요?

그날 저녁, 남편에게 그 해프닝을 말해주었다.

남편은 “가을 되니까 외로운 거야?”라고 놀리며, 내 귀에 대고 “만나볼래요?”를 연거푸 말하며 쫓아다녔다. 덕분에 유학 간 딸의 빈자리로 조용했던 저녁 식탁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남편과 한바탕 또 웃고 나니 퇴근 후의 피로도 풀리는 듯했다. 나는 다시 기운을 내어 두부부침과 동그랑땡을 구우며 엄마에게 가져갈 반찬의 가짓수를 늘릴 수 있었다.


다음 날, '반찬가게 플러팅 해프닝'을 들은 엄마와 언니는 배를 잡고 웃었다.


“너도 참, 어떻게 그 말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
이성적인 언니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 계속 웃었다.


“우리 딸이 예쁘니까, 그럴 수 있다니까!”
여전히 딸바보인 엄마도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반찬에는 웃음 양념이 특별히 솔솔 뿌려졌으니 더욱 맛나게 드실 수 있지 않을까.



부끄러움은 순간이고, 웃음은 오래 남는다. 반찬가게에서의 짧은 해프닝은 하루의 피로를 날려주고, 우리 가족의 웃음 양념이 되었다.


예고 없이 웃음이 터지고, 뜻밖의 민망함 속에서도 즐거움이 숨어 있다. 시행착오와 황당한 순간도, 시트콤 속에서는 가장 웃는 타이밍이 된다. 우리 삶은 이렇게, 때로는 각본 없는 시트콤처럼 흘러간다.


어떤 시트콤으로 코스모스 같은 웃음을 또 짓게 될까 기대가 되는 가을이다.




















keyword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