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보다 큰 웃음달이 떴다.
명절 연휴라서 나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결국, 밤운동을 나섰다.
요 며칠 몸이 유난히 찌뿌둥했다. 매일같이 걷던 루틴이 깨지자, 쉬는 날인데도 오히려 몸이 더 무거웠다. 몸도 마음도 멈추면 금세 녹이 슬어버린다.
운동화를 신으니 발끝에서부터 힘이 솟는다.
집 앞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을밤의 공기가 코끝을 타고 폐 깊숙이 스며든다. 그 공기는 시원하고, 바람결은 반갑다.
나는 숨을 고르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 익숙한 리듬이 몸 안 어딘가를 깨운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저절로 외친다.
“아, 역시 나오길 잘했어.”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은은한 풀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명절 동안 쌓인 기름기와 나른함이 한 겹씩 벗겨지는 듯하다.
밤하늘에는 이부자리 같은 구름이 덮여있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한 동네의 이런저런 소리들은 묘한 마음의 위안이 된다.
나는 언제나처럼 팔을 크게 흔들며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오늘의 밤공기는 명절 특유의 정적이 섞여 있다.
평소 오고 가던 차도 뜸하고 이 시간에 마주치던 조깅하는 이웃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평소에도 조용했던 골목이 더욱 고즈넉하다.
‘다들 가족들과 모였겠지, 오랜만에 부모님 댁으로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들 여행들을 갔을까.’
걷다 보니 어느 집 담장 너머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공기 중에 퍼진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밤공기 속에서 방울방울 터진다. 조용한 가운데 그래도 명절이구나 싶다.
밤공기는 시원하고 어느 집 감나무는 실하게 영근 감들의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운지 가지가 담장을 넘었다. 대롱대롱 달린 감들이 마치 주황빛 등불 같다.
그 빛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도 따라 흔들린다.
익어가는 계절, 익어가는 나이, 그 둘이 묘하게 겹쳐진다.
저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 하나가 보였다.
작은 바퀴 달린 씽씽카에 알록달록 불빛이 달려 있고, 그 위에는 나풀나풀한 원피스를 입은 꼬마가 타고 있었다.
꼬마 곁에는 자그마한 아주머니 한 분이 함께 걷고 있다. 아마 꼬마의 할머니인가 보다. 집집마다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 덕분에 두 사람의 모습이 제법 또렷하다.
꼬마의 짧은 다리와 할머니의 느릿한 걸음이 나란히 이어진다.
그 모습이 정겹다.
‘명절이라 손녀가 놀러 왔나 보다.’
나는 그들을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걸음을 늦추지 않고 지나쳐간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저기 저 언니, 엄청 빠르게 걷네. 우리도 저 언니처럼 걸어볼까?”
순간, 내 귀가 당나귀 귀처럼 커졌다.
다시 이어 들리는 말.
“와, 언니 빠르지? 우리도 빨리 걷자!”
그리고 바로 뒤따르는 꼬마의 또렷한 목소리.
“응, 언니 빠르다.”
언니? 언니라니!
내 발걸음이 잠시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할머니와 꼬마가 내 쪽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환했는지, 순간 세상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또 한번 돌아보았다.
그러자 꼬마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대로 걸음을 이어갔다.
마치 그 ‘언니’라는 단어에 마법이 걸린 것처럼, 발이 더 가볍고 빠르게 움직였다.
걷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언니! 언니! 언니!
그 단어가 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꼬마의 할머니는 단순히 ‘아줌마’ 대신 ‘언니’라고 말해준 걸까?
혹은 어두운 밤이라 내가 젊어 보였던 걸까?
아니면, 그저 듣는 내 기분을 살짝 띄워주려는, 세심한 다정함이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평소의 나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멈춰
“아이고, 예쁘다. 할머니랑 놀러 나왔구나?”
하며 말을 걸었을 것이다.
“보기 너무 좋아요.”
그 말 뒤로 웃음 한 줄도 덧붙였겠지.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 ‘언니’라는 말이 내 다리 근육 어딘가를 자극한 듯, 발이 더 가볍고 빠르게 움직였다.
한참을 걸으며 혼자 피식피식 웃었다.
오십이 넘어서, 꼬마 입에서 ‘언니’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 한마디가 나를 멈추지 못하게 했다.
언니라 불리니, 정말로 발끝이 다시 살아났다.
‘그래, 오늘은 그냥 언니로 걷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달 대신 가로등 불빛이 인도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 불빛 아래에 비친 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언젠가부터 내 그림자는 조금은 굽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어깨는 무게를 배웠고, 허리는 습관처럼 숙여졌다.
하지만 그날따라 내 그림자가 유난히 곧고, 경쾌하게 흔들렸다.
마치 진짜 ‘언니’가 된 듯, 생기 있는 걸음으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하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몸의 무게중심을 바꾸고,
한 줄의 말이 마음의 방향을 바꾼다.
그날 밤 나를 다시 세운 건 근육도, 의지도 아닌
단 두 글자, ‘언니’였다.
걸을수록 마음이 밝아지고, 어깨가 가벼워졌다.
'언니'라는 단어는 어쩌면 나이를 잊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그 길을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나 더 돌았다.
연휴 내내 비가 잦아 보름달은 보지 못했지만,
그날 밤 나는 쟁반 같은 웃음달 하나를 마음속에 품었다.
그 웃음달은 내 발걸음을 밝히고,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걷게 했다.
'언니의 발걸음으로.’
그날의 언니라는 단어는 내게 단지 젊게 불린다는 기분 좋은 오해 때문이 아니라,
그 말속에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생기 있는 존재’로 비친다는 따뜻한 인정과 다정한 시선이 함께 담겨 있었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점점 움직임의 속도와 빈도를 줄여가는 일 같다.
몸도, 말도, 마음도 조심스러워지고,
세상과의 거리를 살짝 두며 스스로의 자리를 작게 줄여가는 일.
그런데 그날 밤, 귀여운 꼬마의 한마디가 내 안의 무게추를 톡, 건드려 주었고 내 안의 리듬을 깨워주었다.
걷는다는 건 어쩌면 그렇게 다시 나를 일으키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세상 속으로 그리고 내 안으로,
느려졌던 생의 리듬을 다시 깨워주는 것.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가 서로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가 때로는 운동보다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그 말이 하루를 버티게 하고, 한 사람을 다시 세우는 빛이 된다는 것을.
그날 밤, ‘저기 저 언니’는 그저 나를 향한 오해의 호칭이 아니었다.
그건 내 안에서 잠시 잠들어 있던 ‘살아 있는 나’를 깨우는 주문이었다.
보름달보다도 더 크고 환한 그 주문이 내가 걷는 길 위를 오래도록 비춰주었다.
**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