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의 시간과 고찰
바닷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책방 앞 풍경은 고요했다.
작은 나무 간판 위에 정성스럽게 쓴 붓글씨.
‘소연의 책방.’
서진은 문을 열기 전,
가슴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문 너머에
그녀의 ‘과거’가
살아 숨 쉬고 있을지도 몰랐다.
딸랑.
“어서 오세요.”
맑은 목소리.
책상 너머,
중년의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눈썹, 긴 속눈썹,
서진과 놀랍도록 닮은 옆선.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췄다.
“…어…?”
여성의 입가에서 숨이 흘러나왔다.
책에서 떨어진 손끝이 떨렸다.
“당신이… 혹시…”
서진은 한 발짝 다가섰다.
“엄마… 맞죠?”
여성의 눈이 크게 열렸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가리고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 서진아?”
서진은 그 말에,
스스로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엄마… 왜 날 두고 가셨어요?”
조용한 책방의 작은 방 안,
찻잔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나는 널 버린 게 아니야.”
어머니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그날… 난 널 찾으러 갔어.
하지만 이미 네가 없었어.
어디에도, 아무에게도 널 데려갔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지.”
서진은 조용히 손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그냥, 포기한 거예요?”
어머니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몇 년을 찾아 헤맸어.
하지만 서류는 다 지워졌고,
나는 더 이상 너를 찾을 힘도, 돈도,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이곳으로 왔지.
세상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
“왜 돌아가지 않았어요?”
“… 네 아버지가 널 잊으라고 했거든.
내가 더 들쑤시고 다니면, 널 해칠 수도 있다면서.”
서진은 벽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 거예요?”
“그건…
너무 죄책감이 컸기 때문이야.”
서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머니를 원망하면서도,
그녀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기쁨이 밀려왔다.
“엄마…”
그녀는 한 마디를 꺼냈다.
“이젠, 다시 날 잊지 말아요.”
서진은 어머니와 재회한 후, 많이 달라졌다.
목소리도, 눈빛도.
처음 만났을 때의 서진은
모든 걸 스스로 들고 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기록자처럼 다루고 있었고,
누군가의 딸이라는 타이틀도,
입양인이라는 정체성도,
그저 과거의 한 항목처럼 메모하듯 말했다.
"덴마크에서 자랐습니다."
"서류상으론 고아였죠."
"아마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이 모든 말이
사실인데 감정이 빠져 있었던 것.
나는 그런 서진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자기감정을 일부러 잘라내고 말하네.
왜일까.
기록을 믿지 못해서일까,
사람을 믿지 못해서일까.’
그게 내가 그녀에게 흥미를 느낀 이유였다.
지금껏 취재해 온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를 쫓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어머니를 만났다.
놀랍게도,
그 순간 그녀는 더 단단해졌다.
과거를 되찾았다고 울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그녀가 자신의 균열을 붙인 채로 다시 걸어 나가는 걸 봤다.
그게 이상하게도,
나를 멈춰 서게 했다.
어머니에게 안기던 순간조차
서진은 크게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눈물로 무너졌지만,
서진은 조용히 등을 토닥이는 쪽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스스로의 어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그게…
지독히도 인상 깊었다.
누구는 사랑받고 싶어서 울고,
누구는 용서받고 싶어서 울지만,
서진은—
그저 이해하고, 기록하고, 정리하려 했다.
자기 자신을. 그리고 그 시간을.
나는 그날 밤 메모를 남기지 못했다.
기록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내가 문장으로 쓰기엔 너무 조용하고 깊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감정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지켜보고 싶은 욕망’이라는 건
굳이 사랑이나 욕심 같은 걸로 분류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 사람을 그냥, 계속 바라보고 싶다.
그 이유를 아직 모르지만
아마, 그건 진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