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윤이, 돌아온 거 맞지…?”
최선희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간절했다.
가족들 모두가 눈에 눈물을 머금고 서진을 바라보았다.
서진은 머리를 살짝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온몸으로 이 따뜻함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김지윤’이라는 이름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낯설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릴 적 기억은 없지만,
그들이 건네는 추억과 이야기들이 마치 자신의 과거처럼 스며들었다.
"지윤이는 딱 너 같은 눈을 가졌었어."
"고개를 갸웃할 때 왼쪽 어깨가 살짝 올라가곤 했지."
서진은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나도 가끔… 그런 버릇이 있어. 정말, 우연일까?’
며칠 뒤, 최선희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 지윤아, 우리 유전자 검사를 받아볼까?"
그녀의 눈빛엔 두려움과 희망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우린 이미 가족 같지만, 그래도… 마음의 확신을 가지려면 확인해야 하잖니."
서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검사 결과가 정말 그걸 증명해 줄까?’
‘나는 정말 김지윤이 맞을까?’
윤우에게도 그 이야기를 전하자, 그는 예상보다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혹시 결과가 기대와 다르더라도 감당할 준비는 돼 있나요?"
그 말에 서진은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어요."
"근데… 이미 가족이라고 느껴버렸어요."
윤우는 그녀의 손에 유전자 검사 신청서를 건네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서진은 계속해서 자신을 되돌아봤다.
호텔방 창가에 앉아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려 애썼다.
그러던 중,
그녀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이미지 하나에 멍해졌다.
작은 방,
커튼 너머로 비추던 희미한 빛,
그리고…
곁에서 동요를 불러주던 여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덴마크어가 아니었다.
서진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건… 내 진짜 기억일까?’
‘그녀가… 최선희 씨였던 걸까?’
기억은 희미했고,
그녀는 그것이 진짜인지, 만들어진 감정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며칠 후, 윤우는 서진을 다시 만났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노트북을 내밀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 나왔어요."
서진은 숨을 멈췄다.
"… 말해주세요."
윤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일치입니다."
텅.
무언가 가슴속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정말… 아니에요?"
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선희 씨와 서진 씨는 유전적으로 모녀 관계가 아닙니다."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자에 앉은 채, 바닥만 바라보았다.
나는 김지윤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김지윤의 가족이 되고 싶은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럴 리 없어…"
작은 목소리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귀 뒤의 점도, 비 오는 날 사라진 기록도, 다 나랑 맞았어요.
그런데 왜…"
윤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 그 모든 우연들이 모여서, 착각을 만든 걸지도 몰라요."
서진은 눈을 감았다.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것은 실망이라기보단,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감이었다.
그녀는 며칠 후, 검사 결과를 들고 최선희를 다시 찾았다.
서진은 조심스레 봉투를 건넸다.
"결과… 나왔어요."
최선희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결과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네 눈에서 지윤이를 봐."
"그리고… 만약 너도 괜찮다면,
가끔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
나는 네가… 지윤이든 아니든, 그냥 그 자체로 소중하니까."
서진은 그 말을 듣고
참고 있던 눈물을 조용히 흘렸다.
그녀는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서진은 봉투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불일치."
그 단어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존재할 곳을 잃어버린 것처럼.
최선희는 조용히 결과지를 접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윤아."
그러나 곧 미소를 머금은 채 덧붙였다.
"아니, 이제 네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족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최선희는 여전히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넌 지윤이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겐 네가 소중한 사람이야."
그 말이, 이상하리만큼 가슴을 찔렀다.
혈연이 아닌데도, 가족이 아니어도…
이렇게 누군가가 나를 받아들일 수 있구나.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공허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불안이 그녀를 조여왔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에서 온 걸까?’
서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 이상 착각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진짜 나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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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 기자 사무실
며칠 후, 서진은 윤우와 다시 마주 앉았다.
윤우는 그녀에게 한 장의 문서를 내밀었다.
"서진 씨, 여기 새로운 단서가 있어요."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1993년 – 실종 아동 명단 (국내 미등록 입양 가능성)
1993년 – 성덕 고아원 관련 아동 명단
그리고 그 속에서, 그녀의 눈에 띄는 한 이름이 보였다.
‘박서진’
"… 이건 뭐죠?"
"이건 네덜란드로 입양될 뻔했던 아이의 기록이에요.
하지만 이 아이는 기록상 존재하지 않는 아이로 되어 있어요.
즉, 실종된 후 공식적인 서류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커요."
"그럼… 저랑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커요.
그리고 이 아이를 담당했던 사람이 한 명 있어요."
서진의 심장이 뛰었다.
"누구죠?"
윤우는 노트북 화면을 돌려 보였다.
조미정
서진의 눈이 커졌다.
"… 조미정?"
"맞아요. 그때 성덕 고아원에서 일했던 유일한 생존자죠."
그녀의 가슴이 점점 조여왔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조미정을 만났다.
그러나 조미정은 당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이제, 그 이유가 분명해졌다.
‘그녀는 내 과거를 알고 있다.’
서진은 다시 그곳을 찾았다.
이번에는 더 이상 돌아서지 않겠다고 다짐한 채.
딸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미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또 왔네."
서진은 그녀의 앞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요, 그렇죠?"
조미정의 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난… 아무것도 몰라."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서진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조미정 씨,
저는 성덕 고아원에서 실종된 아이였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 기록을 담당했죠."
조미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피하고 싶어 했지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마침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아이는 원래 네덜란드로 가야 했어."
"뭐라고요?"
서진은 놀라서 되물었다.
조미정은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원래 네덜란드로 입양될 예정이었어.
하지만 입양 서류가 조작됐고,
결국 다른 아이가 네덜란드로 가고,
너는 어디론가 사라진 거야."
서진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럼, 저는 원래 어디로 가야 했던 거죠?"
조미정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의 원래 가족은,
한국에 남아 있었어."
서울, 서대문 – 오래된 집
며칠 후, 윤우와 함께 서진은 오래된 주택 앞에 서 있었다.
그곳은 조미정이 알려준 곳이었다.
"여기… 정말 제 가족이 살던 곳이에요?"
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그들은 20년 전에 떠났어요."
서진은 문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대문, 낡은 창문, 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기억들이 가득할 것만 같은 공간.
그녀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릴 적 사진 한 장
낡은 서랍 속에서 발견된 사진.
그 속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서진은 손을 떨며 사진을 들어 올렸다.
‘이 사람이… 내 어머니였을까?’
그녀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사진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제는 김지윤이 아니라,
진짜 ‘나’를 찾아야 할 때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