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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잔인한 진실

by 아이린

서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진 속, 작은 여자아이.
그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성.

‘이 사람이… 내 어머니였을까?’

서진은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뚜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 사진은 왜 여기 남아있을까?

"어떻게 생각해요?"

옆에서 윤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나랑 닮았어요."

그녀는 사진 속 아이와 자신을 비교하며 중얼거렸다.
작은 입술, 동그란 눈,
그리고 어딘가 불안한 표정.

마치 어딘가를 떠나기 직전의 얼굴처럼.

‘이 아이가 정말 나라면… 나는 왜 사라졌을까?’

그녀는 사진을 살폈다.
그리고, 희미하게 적힌 글씨를 발견했다.

1993년 5월 12일 – 우리 서진이, 생일날

서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 박서진."

그녀의 손끝이 사진을 더 세게 쥐었다.

그 순간,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비 오는 날.

작은 손이 누군가의 옷을 잡고 있었다.
손은 따뜻했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돌아올게."

그러나, 다음 순간.
손이… 놓였다.

그리고,
그녀를 감싸던 세상은 온통 낯설어졌다.

서진은 여전히 그 집 안에 있었다.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거실,
먼지 쌓인 식탁 위엔 오래된 찻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벽시계는 멈춰 있었다.
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1993년 5월 12일 – 오후 2시 13분.

“이 집… 시간이 멈춘 것 같아.”

서진은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그녀는 다시 사진이 있던 서랍으로 다가갔다.
누군가의 손 편지가 접혀 있었다.

서진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감싸 쥐었다.
글씨는 흐트러져 있었고, 종이는 군데군데 젖은 자국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곳에 남기고 간 마지막 희망처럼.

"이 집엔 왜 아무도 살지 않았던 걸까요?"

윤우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현관 근처 벽면에 붙어 있는 오래된 부동산 고지서들을 떼어냈다.

"1994년부터 아무도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어요.
사망 신고도 없고, 매각도 없고,
그냥… 멈춰 있었던 거죠."

서진은 천천히 말했다.

“그럼 이 집은… 어머니가 실종된 이후로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거네요.”

“맞아요.
누군가는 이 집이 ‘기다림의 장소’가 될 줄 알고 일부러 손대지 않은 걸 수도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서.”

서진은 조용히 사진을 다시 쥐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깊은 슬픔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잊힌 아이였고,
이 집은 그녀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 남겨진 공간이었다.

서울, 성덕 고아원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

서진과 윤우는 오래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과거 성덕 고아원이 있던 자리였다.
지금은 다른 시설로 바뀌었지만,
그녀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근처에서 고아원에서 일했던 노인 한 명을 수소문해 만났다.

이영순 (78) – 전직 보육교사

노인은 서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박서진?"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를… 기억하세요?"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 아이였구나…"

그녀는 마치 오래 잃어버린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눈물을 글썽였다.

"너는 이곳에서… 많이 울었어."

"…"

"네 어머니가 너를 데려오더니,
'금방 돌아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라고 말했지.
하지만, 결국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어."

서진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났다고요?"

노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그분은 돌아오려고 했어."

서진은 혼란스러웠다.

"그럼 왜… 왜 오지 못했나요?"

노인의 입술이 굳어졌다.

"그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 사고가 있었거든."


"그날, 네 어머니는 분명히 널 찾으러 오려고 했어.
하지만, 누군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지."

서진은 조용히 노인의 말을 기다렸다.

"당시, 불법 입양 중개인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던 시기였어.
특히 성덕 고아원은 그들의 손길이 닿아 있었지."

서진은 손을 꽉 쥐었다.

"그들이… 나를 다른 곳으로 보냈나요?"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고아로 만들고, 다른 가정에 넘기려 했지."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네 어머니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
계속 널 찾으러 다녔지."

그러나, 결국.

어머니는 실종되었다.

서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럼, 제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노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네가 남아있던 흔적은 아직 어딘가에 있을 거야."

윤우의 사무실

며칠 후, 윤우가 서진에게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서진 씨, 어머니를 찾을 가능성이 있는 단서를 찾았어요."

서진은 급히 서류를 넘겼다.

1993년 6월 – 실종자 명단
신원 미확인 여성 한 명, 당시 성덕 고아원 근처에서 마지막 목격

서진의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이분이… 제 어머니일 수도 있나요?"

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가능성이 커요."

서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이제…"

"우린 이제 그녀를 찾아야 해요."

서진은 그 말을 들으며 천천히 사진을 가슴에 품었다.

과거의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찾고 있는 진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왜 실종되었을까?
그리고,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며칠 후, 윤우는 또 다른 단서를 찾아냈다.

"서진 씨.
당신의 이름이 '박서진'이라면,
이 주소지로 과거 실종 신고를 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요.
‘박기훈’이라는 이름입니다."

서진은 낯선 이름에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죠?"

"어머니의 동생.
당신에게는… 외삼촌일 수도 있죠."

윤우는 서류를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박기훈 씨는 당시 대학생이었고,
누나인 박영은 씨의 실종 이후, 몇 년간 누나와 조카를 찾아다녔던 기록이 있어요.
하지만 2000년을 전후로, 활동이 멈췄어요.
그리고…"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요?”

"현재 주소는 지방이에요.
강원도에 조용히 살고 있다고 나와 있어요.
한 번 만나보는 게 좋겠죠."


그곳은 산자락 아래 자리한 조용한 마을이었다.
서진과 윤우는 작고 오래된 도자기 공방 앞에 섰다.
바로 그곳에서 박기훈이 살고 있었다.

조용한 작업장 안.
한 남자가 진흙으로 도자기를 다듬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희끗희끗했고, 얼굴에는 깊은 세월이 묻어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박기훈 씨 맞으세요?"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서진은 그의 눈빛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눈빛은 익숙했다.
어딘가 그녀의 기억 저편에서 봤던,
따뜻하고, 슬픈 눈빛이었다.

박기훈은 말없이 서진을 바라보았다.

"저는… 박서진입니다."

그 말에 박기훈의 손이 멈췄다.
그는 도자기를 내려놓고,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 너였구나."

그는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 손… 기억나.
너 어릴 때, 내 손가락만큼 작았는데."

서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삼촌… 정말… 저 기억나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
그날, 널 데리러 가려했는데…
그때 널 지키지 못한 게 내 평생 후회였어."

서진은 다시 어딘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김지윤이라는 착각 속에서 헤맸던 시간은 사라지고,
이제 조각났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정말 어디로 간 걸까요?”

박기훈은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박기훈은 말끝을 흐렸다.

“누나… 그러니까 네 어머니는, 실종된 게 아니야.”

서진은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윤우도 눈썹을 찌푸리며 박기훈을 바라봤다.

박기훈은 무겁게 고개를 떨구었다.

“1993년… 지옥 같은 해였어.
그해 봄, 누나는 남편하고 이혼했어.
네 친아버지가… 가정에 소홀했고, 입양 문제로 누나랑 크게 다퉜지.”

“입양 문제요…?”

“누나는 널 절대 입양 보낼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그 사람… 너를 ‘해외로 보내는 게 낫다’며 서류를 조작했지.”

서진의 눈이 커졌다.

“그게… 진짜였어요?”

박기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그걸 알고 네 아버지와 갈라섰고,
너를 되찾기 위해 온 서울을 뒤졌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널 맡긴 고아원을 다시 찾으러 갔지.”

“근데 왜… ‘실종’으로 기록됐어요?”

“당시 상황이 너무 복잡했어.
누나는 외부와 연락을 끊고, 네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듯 사라졌지.
그걸 두고 다들 ‘실종’이라고 떠들었지만…
사실 누나는 조용히 사라졌을 뿐이야.
살아 있었어. 지금도 살아 있어.”

서진은 숨을 멈췄다.

“… 지금, 어디에 계세요?”

박기훈은 조용히 지갑에서 접어둔 메모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전북 군산, 바닷가 마을 – '소연의 책방'

“거기서 책방을 하고 있어.
‘소연’은 누나가 새로 만든 이름이야.
아무도 찾지 않게, 조용히 살고 싶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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