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의 자리
한편, 서진은
어머니와 함께 마을 시장을 걸었다.
어색함이 조금은 풀린 얼굴.
서로의 생일을 처음 공유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평범한 모녀로 보였을 것이다.
유전자 검사 결과는
‘확실한 친자 관계’였다.
그 말 한 줄이
서진의 마음속 깊은 의심을 단번에 녹였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라는 확신을 얻었다.
"요즘은 어때?"
어머니가 물었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조용하고… 따뜻해요.
그게 너무 낯설지만, 좋기도 해요."
서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에 빛이 비추고 있었다.
***
윤우는 오래된 친구이자 방송사 PD인 장혜수의 전화를 받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작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창밖은 맑았고, 책상 위엔 입양 관련 자료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서진 씨 얘긴 들었지?”
장혜수가 먼저 운을 뗐다.
윤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큐 제안 받았다고요?”
“응. 우리가 기획 중이던 프로그램이랑 잘 맞아서,
처음엔 직접 연락했는데… 그 사람, 좀 조심스럽더라고.”
장혜수는 테이블 위 종이 몇 장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다큐멘터리 기획안 – “나는 어디서 왔나요”
주제: 해외입양, 브로커, 기록 조작, 사라진 아이들
“그래서? 출연한다고 했어요?”
윤우는 무심하게 물었다.
하지만 손끝이 찻잔을 꼭 쥐고 있었다.
혜수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건 하나 걸었어.”
“조건?”
“윤우 기자가 함께하면 출연하겠다고.”
그 순간, 윤우의 손끝이 멈췄다.
“…서진 씨가?”
“응. 이유는 단순했어.
‘그 사람이면 내 이야기를 이상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그 말에 윤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가 속에서 천천히 일렁였다.
그녀는 그를 ‘기록자’로 불렀다.
아니 이건 그녀의 입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기록자인 동시에 증인이기 때문에 곁에 있어도 괜찮다고 말한 셈이었다.
자신의 아픈 이야기 옆에 두어도 되는 사람.
그 말은 어쩌면 고백보다 더 깊은 신뢰였지만,
동시에—그 선을 절대 넘지 않겠다는 서진만의 거리두기 방식이기도 했다.
윤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 같이 하죠.”
그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속은 복잡했다.
장혜수가 웃으며 말했다.
“서진 씨, 틀림없이 할거야. 네가 함께한다고 하면.”
-그날 밤이었다.
서울의 늦은 봄, 창밖으로 가벼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용한 카페 창가.
서진은 차가 반쯤 식은 머그잔을 손에 들고 있었고,
윤우는 그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둘 사이의 테이블 위엔 서류가 몇 장,
그리고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일적인 만남이었다.
하지만 윤우는 그런 형식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서진은 차분했다.
윤우는 그게 늘 이상하다고 느꼈다.
사람은 그렇게까지 조용할 수 있는가,
슬펐던 시간, 찢겨진 과거, 모든 걸 견뎌낸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잔잔할 수 있는가.
어쩌면 잔잔한 게 아니라,
모든 걸 닫아버린 것일지도.
“요즘은… 좀 어때요?”
윤우가 물었다.
사적인 질문이었지만, 너무 무르지도 않게 던졌다.
서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조용해요.
원하던 대로요.”
윤우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얼마나 많은 침묵 끝에 그 말을 만들었는지도.
“…혼자 있는 거, 익숙해져서 그런 건 아니죠?”
그의 말에 서진이 처음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가볍게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혼자 있는 건, 선택이라기보단…
남아 있는 방식 같아요.”
그 말이 윤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사람이 가장 약해질 법한 순간에도
절대로 기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단단함이
윤우에게는 점점 연민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불러왔다.
지켜주고 싶다.
하지만 그 감정조차
그녀에게는 무거운 짐이 된다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은 기자 앞에서 쉽게 하면 안 되죠.”
그가 농처럼 말하자,
서진이 작게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윤우 기자는 그런 말 기사에 쓰는 사람 아니잖아요.”
서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잔을 입에 댄 채 말했다.
“대신… 가끔 감정이 선을 넘어요.”
그 말에 윤우는 입을 다물었다.
서진은 알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그리고, 그 감정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 대상인지도.
“윤 기자.”
서진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건 언제나 종지부 같은 어조였다.
“우리 관계는…
이야기의 사이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해요.”
윤우는 미소 지었다.
그 말이 그녀의 방식이라는 걸 알았기에.
거절도, 거부도, 상처도 아닌—
선 하나를 긋고, 그 안에 머무르자는 서진만의 다정함.
“알아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서진도 다시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알고 있었다.
그 거리의 이름이
마음이 닿기 직전에 멈춘 감정이라는 것을.
카메라의 빨간 불이 꺼졌다.
녹음기의 시간표시가 “01:02:17”에서 멈췄다.
순간 그날 밤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서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고 , 의자에 등을 붙였다.
방금까지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몰랐던 시간들을 조리있게 말해냈다.
입양 기록의 조작, 고아원에서의 기억 없는 시절,
엄마를 찾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진실이 일치했던 순간의 공허함까지.
윤우는 옆방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고,
눈빛도 단 한 번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이 이야기를 온전히 소화한 사람처럼.
하지만 윤우는 안다.
그 단단함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만든 갑옷이라는 걸.
서진이 종이컵 커피를 꺼내 들고 있던 순간,
윤우가 다가왔다.
“오늘 인터뷰… 괜찮았어요.”
그는 말끝을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괜찮다기보다는…”
서진은 말없이 웃었다.
“그냥, 끝낸 거죠.”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말’로 정리하는 게요.”
그녀는 말을 하며 벽에 기대섰다.
커피는 따뜻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다큐멘터리 들어가기 전에, 솔직히 고민했어요.”
서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왜요?”
“증인이 옆에 있으면 덜 외롭잖아요.”
그 순간, 윤우는 다시한번 무너질 뻔했다.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한 이유가
감정이 아니라 '증인' 그리고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기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슴을 묘하게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