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말 수박

제1장 음식 편

by 겨울나무

누가 저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묻는다면 고민하지 않고 수박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음식을 질릴 때까지 먹다가 질리면 딱 끊고, 좋아하는 음식 목록에서 제외하거나, 잘 안 질리면 후순위로 밀어냅니다. 그렇게 순위를 까다롭게 정하는 저에게서 1등을 차지한 음식이 수박입니다. 시작을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하면 어느 정도 글에 방향이 잡힐 거 같아서 수박으로 정했습니다.

네, 오늘의 주제는 수박입니다.


아빠가 수박을 좋아하셔서 저도 어릴 때부터 수박을 매 여름마다 질릴 만큼 먹었습니다. 그래서 수박은 막 먹고 싶어 하다가 먹기보다 항상 여름이면 당연하게 먹는 친숙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딱히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생각 안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혼자 살게 되니 수박을 먹기가 어려웠어요. 일 년에 한 번 먹으면 감사할 정도였어요. 먹고 싶으면 수박주스로 때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박주스를 먹을 때마다 막 잡은 물고기 마냥 파닥거리면서 즐거워하는 저를 발견하고 "수박을 좋아하는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러다 공부하려고 집에 돌아와서 수박을 왕창 먹었습니다. 23살 6월에 돌아와서 ~ 25살 7월 말에 독립했으니 3년? 내내 먹은 게 아니니까 3번? 횟수로는 몇십 번 먹었는데... 헷갈리네요. 아무튼 간에 노린 것은 아니지만 수박 시기 생각해서 집에 왔다간 사람 같네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6월쯤 되면 제가 들뜬 마음으로 수박 빨리 먹고 싶다고 말합니다. 수박은 6월이 가기 전에 먹어야 한다며 이상한 논리를 펼칩니다. 그러면 저희 아빠는 매년 "어휴~ 올해는 수박값이 너무 올라서 못 사 먹겠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일주일에 한 번은 수박을 사 오시더라고요.


아빠는 수박을 사 오자마자 일단 속에 문제가 없는지 잘라보라고 합니다. 갈라보니 정말 상해있어서 과일가게에서 바꿔준 기억이 딱 한 번 있긴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냥 얼른 먹고 싶어서 갈라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아빠와 저는 자른 수박을 한 입 먹어보며 잘 골랐는지 평가에 들어갑니다.


"오 달다! 그런데 너무 익었고 씨가 많네."


"음?!! 아삭아삭 하다! 완전 내 좋아하는 수박이야!"


그리고 아빠가 꼭 물어보는 게 있습니다.


"얼마였게?"


"음~~ (이 정도 크기에 잘 익었고, 씨도 적고, 좀 고급진 스티커가 붙었으니까) ~~ 원 정도 하겠네!"


예상보다 낮으면 쩝하며 입맛을 다시고 대답 없이 가버리고, 예상보다 높으면 아주 뿌듯한 얼굴로 가격을 알려줍니다. 그럼 저는 뭔가 횡재한 듯한 기분으로 더 맛있게 먹습니다.


그리고 수박 먹을 때마다 제가 질리도록 하는 말이 "내가 수박만큼은 아빠보다 더 좋아해." 그걸 듣고 아빠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뀝니다. 그래서 수박을 끝까지 다 먹을 때쯤 이번엔 아빠가 더 많이 먹었나, 제가 더 많이 먹었나 혼자 생각해보고는 합니다. 과일 하나 두고 이상한 심리전이 펼쳐지죠. 그렇게 제가 더 먹었다는 생각이 들 때 뿌듯하게 자랑하듯 말해요. 그럼 아빠를 제외한 다른 가족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우리는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아서... 그래 너 많이 먹어~ 잘했네~"라고 해줍니다.


수박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향이 너무 좋아요. 달달한데 눅진하지 않고 청량하게 퍼지는 향을 맡으면 황홀해요. 이 공간에서 오래 숨 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과일은 안 그러는데 수박만 그래요. 그리고 시원하게 달달하고 부드럽게 아삭함이 조화로워서 좋아해요.


아! 여러분 과일을 고를 때 신맛파와 단맛파로 나뉘는 거 아시나요?

대표적으로 귤이 논쟁에 대상이 되는 대요.

귤은 원래 달아야지. 가끔 신맛 나는 것도 있는 것이고. VS 아니지 귤은 새콤해야지. 가끔 달기만 한 것도 있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나뉜대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딸기와 포도, 사과, 키위로도 한 번 떠올려보세요.


다 익은 달달함 vs 살짝 덜 익은 상큼함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신맛 파입니다. 초록색이 서려있는 귤, 새콤한 딸기, 새콤한 포도, 풋사과, 무르지 않은 키위를 좋아합니다.


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수박도 새콤한 상태를 좋아합니다. 아니? 수박에 신맛이 있나? 의아하시죠?


수박은 당연히 속이 빨갛다고 생각하지만, 6월 말에 산 수박은 약간 다홍색에 가까워요.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색상이 다홍색이고, 저 혼자 6월 말에 수박색이라고 부른답니다. 노란 수박을 먹어봤는데 분명 맛있지만 뭔가 충족이 안 된 기분이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제가 후드티가 딱 하나 있는데 수박색이에요. 그리고 수박색 남방이 긴팔, 반팔 하나씩 있었는데 반팔은 5년 정도 입고 낡아서 올해 버렸어요.


말이 약간 샜네요. 여하튼 6월 수박은 아삭하고 아주 아주 약간 새콤하면서 덜 달아요. 그리고 확실하지 않지만 제 코에는 향이 더 좋은 거 같아요.


그럴 거면 오이를 먹으라고요?


아뇨~ 오이도 아주 좋아하지만 수박만, 오로지 수박만 낼 수 있는 적당한 맛이 있어요.


아 그리고 수박 빙수 드셔보셨어요? 화채 말고 우유 들어산 빙수요. 저는 우유랑 수박이 그렇게 잘 어울릴 줄 상상도 못 했어요. 저는 수박 본연의 맛을 워낙 좋아하니까 화채도 안 해 먹거든요. 감히 사이다가 수박의 맛을 흐리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수박 빙수가 있다길래 인심 쓰듯이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맛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그 이후로 수박을 사면 컵에 우유를 조금 붓고 수박을 작게 몇 조각 넣어 먹습니다. 그래도 그냥 먹는 게 가장 맛있긴 해요.


아 그리고, 여러분 얼린 수박 먹어보셨어요? 제가 얼린 블루베리는 좋아하는데요. 수박은 뭐랄까? 편식 안 하시는 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하시는 맛? 어떻게 알았냐고요? 저도 알고 싶지 않았어요. 재작년에 아빠가 빨리 시원하게 먹겠다고 냉동실에 잠깐 넣어 놓는다는 게... 네, 예상하신 것처럼 그대로 깜빡하셨어요. 그걸 아깝다고 둘이서 숟가락으로 긁어먹은 기억이 나네요. 어떤 맛인지 바로 이해되게 설명드릴 수 있어요. 보통 수박을 잘라서 통에 담아 보관하시거나 랩을 씌우시잖아요. 그런데 랩이 전체적으로 제대로 안 씌워져서 일부분이 빨갛고 미끌거리는 맛인 거 아시죠? 딱 그 맛없는 부분만 계속 먹는 맛입니다.


그리고 저는 수박을 먹으면 배가 아픕니다.


아니 그러면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요?


프롤로그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안 아픈 음식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웬만한 음식에 배가 아파요. 그 사실이 저에게 너무 익숙하지만 수박에서 만큼은 속상하네요. 정말 좋아하니까요.

일이 너무 힘들 때 "으윽 그냥 다 던져버릴까?" 싶다가도
"아니야, 수박 먹으려면 돈 벌어야지."

너무 괴로운 일을 겪었을 때 "살기 싫다..." 싶다가도 "수박 먹어야 하니까 딱 내년 여름까지만 살자."

혼잣말을 할 정도로 좋아합니다.

하... 이 정도면 수박 농사를 지으면... 상상만 해도 신나네요.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편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단 하나만 고르라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음식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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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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