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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이네 Aug 17. 2024

내가 주문해 줄게

영어를 배우는 뚱이의 각오

  뚱이가 태어나기 전, 나와 남편 둘이서 떠났던 여행은 나름 분업이 철저하고 팀워크가 잘 맞는 편이었다. 전체적인 계획과 예약은 내가 맡아서 총괄한다. 일정, 메뉴, 교통 등 세부적인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출국하는 그날까지 나의 큰 기쁨이다. 여행 전반에 대하여 남편은 큰 불만 없이 함께해주므로 늘 든든하고 좋은 여행 메이트였다.

  여행지에서의 역할도 각자의 장점을 살려 적절히 분배하곤 했다. 현지에 도착하면 의사소통은 내가, 길 찾기는 남편이 맡는다. 여행 준비를 하며 수없이 지도를 보았어도 나는 언제나 길을 잘 못 찾는다. 언제 얼만큼을 직진해서 방향을 꺾는지까지 친절하게 지도 앱이 알려 주건만, 현대문명은 나의 부족한 공간 감각을 메꿔주지 못한다. 미국에서 차를 렌트했을 당시, 나는 조수석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도움 되는 사람 역할을 맡았었다. 방향 감각만 없는 것이 아니라 면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싱가포르 여행은 역할을 분담할 팀원이 셋으로 늘었다. 요즘 뚱이를 보면 북해도에 갔던 작년 여름보다 키도 마음도 쑥 자랐다는 것이 종종 느껴진다. 게다가 여행 가는 시점에 뚱이는 한국식 세는 나이로 7살이 된다. 원래 어릴 때는 한 살 차이가 제일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뚱이에게 7살은 어디든 여행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언니’들의 나이다. 7살의 뚱이는 이번 여행에서 크고 작은 역할들을 맡아서 해낼 예정이다.     

   



  여행의 든든한 새 팀원, 뚱이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감이다. 여행 가면 캐리어도 본인이 끌고 갈 것이며, 조식을 먹을 때는 스스로 접시를 들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병’이라는 글자의 어감이 별로여서 좋아하진 않는 단어지만, 이 말이 딱이다. 어떤 어린이든 서너 살이면 시작한다는 ‘내가병’이 아직 진행 중이다.     

작년 여름, "내가 밀거야!"

  뚱이가 이번 여행에서 해보겠다며 나선 것 중 무엇보다도 엄마 아빠에게 큰 기대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은 바로 영어다. 이번 여행에서 뚱이는 무려! 영어로! 주문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장소와 메뉴는 이미 정해졌다. 아빠는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 엄마는 따뜻한 카페라테 한 잔, 본인은 주스 한 잔이다. 평소의 취향을 고려한 선택이다. 나는 겨울의 평균 기온이 이십도 중후반을 오가는 더운 나라에 가서 김이 펄펄 나는 커피를 마시게 생겼지만, 딸이 주문해 준다는데 날씨가 대수인가 싶다. 뚱이의 역사적인 첫 영어 주문인데, 뜨거운 커피가 아닌 그 무엇도 마실 각오가 되어 있다.     


  싱가포르는 영어를 자유롭게 쓰는 국가다. 어디에나 영어가 병기되어 있고,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와 남편은 다르다. 철저하게 한국식 입시 교육만을 받아 왔고, 영어가 유창하지 않다. 외국인이 말을 걸면 부담스럽고 난처한 게 사실이다.

  부지런한 엄마들은 자녀들에게 본인이 겪었던 고생을 줄여주고자 영유아 시기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영어 노출을 많이 시켜주고, 집에서도 영어를 자주 접하게 해준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뚱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기 이전에는 영어를 들어본 일이 없다. 그래도 올해부터 다니게 된 유치원에서의 영어 수업이 늘 재밌고 새로운지, 영어 선생님이 오시는 날은 즐겁고 좋다고 한다. 남편과 나는 그런 뚱이를 보며 긴 상의 끝에 얼마 전부터 동네에 있는 작은 영어 교습소에 뚱이를 보내고 있다.

  처음 영어학원에 보낼 때만 해도, 힘들어하면 그냥 관두고 놀이터나 데리고 다녀야지 싶었다. 그런데 뚱이는 영어학원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어떤 요일은 4시부터 태권도에 영어학원까지 두 탕을 뛰며 강행군을 하는데도 가고 싶다고 한다. 이쯤 되면 뚱이의 학업 스트레스가 아니라 엄마 아빠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해야 하지 싶다.     

    



  뚱이를 영어학원에 보내며 지출이 늘었다.

  그러나 영어학원에 들어가는 학원비를 생각하며 오늘은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지 아이에게 일일이 확인하고 다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믿고 맡겼으니 내가 할 일은 뚱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 있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와 자랑거리들을 잠자코 들어주는 것 뿐이다.

  영어 주문도 마찬가지다. 영어로 숫자도 겨우 세는 아이에게 유창한 발음과 대단한 대화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저 뚱이가 여행을 가서 영어로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 그 다부진 각오가, 기특하고 귀여운 것이다. 숫자와 메뉴를 말하고 마지막에 플리즈를 붙이면 뭐든 주문할 수 있다고 했더니 뚱이는 그쯤은 별것 아니라는 반응이다.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도 사랑스러운 아이다.


  여행을 준비하며, 나도 여행에 필요한 몇 가지 문장을 이른바 풀 센텐스로 외워갈 생각이다. 번역 앱이 있기에 요즘은 영어를 몰라도 여행에 아무 지장 없는 시대라지만, 뚱이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엄마가 된 나의 작은 허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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