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개를 낳은 죄
항공권 예약을 마친 후 시작해서 6개월 넘게 계속되고 있는 여행 준비 중 가장 먼저 결정된 일정이 있다. 3박 5일을 위해 365일 동안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기다리다가 현기증이 날 것 같다. 이제 싱가포르의 웬만한 명소들은 이미 가본듯 친숙하게 느껴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실 여행 관련 정보를 검색하는 것은 나에게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자 취미이다. 뚱이를 낳고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공항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몇 년 동안에도 나는 늘 떠나고 싶은 곳을 떠올렸다. 여행은 자주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취미까진 아닌것 같고, 남의 여행 후기 읽기가 취미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소한 취미에 뚱이를 낳고서 생긴 작은 변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검색어다. 이제는 여행을 위해 ‘아이와 함께 4박 5일’ 따위의 검색어를 입력한다. 이런 검색어를 넣으면 자동완성으로 채워진 도시명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글이 쏟아져 나온다. 읽으면서 정보를 얻게 되는 글도 있고 부러움을 느끼게 되는 글도 있다. 갈 계획이 없거나 관심 없었던 곳이라 할지라도, 아이를 데리고 떠난 이들의 여행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유아를 동반한 여행기를 읽을 때 특히 공감이 가는점은 이동과 일정이다.
뚱이는 놀이터에서는 두 시간쯤 놀 수 있지만 도보 이동은 20분 정도가 한계다. 그쯤 걸어주었으면 아빠를 한 번 쓱 쳐다보고 “나 다리 아파… 누가 업어주면 좋겠어.”를 연약한 목소리로 뱉어주는 것이 당연지사다. 사계절 내내 구릿빛 피부와 통통한 배를 자랑하는 뚱이에게서 연약함을 찾기는 힘들지만, 이 전략이 늘 먹히는 상대가 있다. 자기를 업고 갈 ‘누구’에 아빠 말고 후보가 어디 있겠는가? 흔들리는 눈으로 잠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가수 임재범의 노래가 생각난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어어~~
그러므로 아이와 함께 가는 여행은 이동에 대하여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싱가포르에 다녀온 사람들의 실질적인 후기를 보면 기내용 유모차, 택시, 리조트 밖으로 안 나가기 등 많은 옵션이 있기는 하다. 이 중 유모차는 제일 먼저 제외된 후보다. 9개월부터 유모차를 싫어했던 뚱이 덕분에 뚱이의 유모차는 중고로 처분된 지 오래다. 나는 숙소에 거의 안 붙어 있는 여행을 할 것이므로 리조트 안에만 있는 것도 안 된다. 여행이 6개월쯤 남은 지금은 캐리어 킥보드가 1순위로 꼽히지만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선택지가 생길 수도 있다.
유모차든 킥보드든, 이동 거리와 체력 소모 등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번 싱가포르 여행에서 꼭 소화해야 하는 일정! 다가올 가족 여행의 일정 중 가장 먼저 확정된 중요한 스케줄은 바로 워터파크다.
우리의 3박 5일 일정 중 둘째 날은 뚱이의 생일이다. 그날 일정은 생일 주인공이 원하는 대로 짜기로 하고, 뚱이에게 몇 가지 후보를 주었다. 새로 산 싱가포르 여행책을 함께 보며 센토사의 다양한 액티비티에 대해 혼자 떠들고 있는 엄마의 말은 한참 전부터 안 들리는 상태다. 남들이 다 간다는 유니버셜 스튜디오도 뚱이에겐 관심 밖이다. 뚱이는 싱가포르에 워터파크가 있단 얘기를 듣자마자 단호하게 정했다. 워터파크에 가겠다고 말이다.
뚱이는 물을 참 좋아한다. 여름이면 당연히 어디로든 물놀이를 가야 하고, 어디서든 물이 있으면 일단 들어가 봐야 하는 아이다. 한 번은 전주 한옥마을에 갔다가 길옆으로 흐르는 작은 도랑을 보고는 다급히 신발부터 벗어젖혔던 전적도 있다. 한옥마을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천천히 산책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오로지 바닥만, 그리고 그 바닥으로 흐르는 물길만 쳐다보고 올 줄은 몰랐다.
여기서 반전 아닌 반전은 나와 남편은 물놀이를 안 좋아한다는 것이다. 둘 다 수영도 못 하고, 물에서 노는 것에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내 남편은 뚱이를 낳고 워터파크에 처음 가본 사람이다. (나는 그래도 대학생 때 친구들과 딱 한 번 가봤다!) 우리는 그저 물개를 낳았다는 죄로 열심히 따라다닐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행의 둘째 날 일정을 제일 먼저 정했다. 물놀이가 전부이므로 엑셀에 따로 메모할 것도 많지 않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름도 뭔가 멋지고 엄청날 것 같은 느낌의 ‘어드벤처 코브 워터파크’다. 이 날은 공주님께서 귀가 허락을 내리실 때까지 하루를 물에서 불사르기 위하여 근처 리조트도 1박을 예약했다.
이 워터파크에는 가오리도 살고, 돌고래도 볼 수 있고, 스노클링이란 것도 할 수 있다고 했더니 뚱이의 기대감은 날로 높아져 가고 있다. 아직 바다탐험대 옥토넛의 시대에 살고 있는 뚱이는 돌고래를 실제로 볼 수도 있고 만져볼 수도 있단 소식에 까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온갖 감탄사로 설렘을 표현했다. 순간 돌고래가 있는 수족관에는 가면 안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하지 못하고 여행 다녀온 후로 미뤄두기로 한다.
나도 남편과 함께 각오를 다져본다. 물놀이로 인한 급격한 기력 소진을 알코올로 보충할 계획을 세워보았다. 싱가포르는 술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고 술값이 비싸다던데, 워터파크에서 맥주 한 잔을 사 먹으면 얼마일까? 설마 맥주도 안 파는 곳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