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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이네 Aug 31. 2024

여행지 3종 세트

알레르기, 변비, 기관지염

  나는 평소에 병원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편이며, 건강을 감히 장점으로 내세울 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뭐든 잘 먹고,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잘 싼다. 여행에 최적화된 체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지간해서는 잘 아프지 않으므로 나 같은 사람이 여행 갈 때 챙기는 비상약 꾸러미는 참으로 초라하다. 그마저도 국내 여행이면 어디에나 약국이 있으므로 과감하게 생략한다.

  평소 믿을 것이라곤 체력과 건강뿐인데, 여행지에서 아프면 정말 속상하다. 예측이 가능한 범위의 일-감기, 배탈 등-이라면 빠르게 대처라도 할 수 있다. 여행 전에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병명이 여행지에서 찾아오면 난감함을 넘어서 짜증이 나고 눈물이 난다.

  이 글의 부제이기도 한 ‘알레르기, 변비, 기관지염’은 내가 평생 딱 한 번씩 겪어본 질병이다. 그것도 여행지에서 말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그 당시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짠한 이야기였다.




  나는 햇빛 알레르기가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햇빛을 오래 쬐면 손, 팔 등 신체 일부에만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다. 그리고 특정 성분이 들어 있는 자외선차단제를 바르고 햇빛을 받으면 그 부위에만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평생 모르다가 스무 살이 넘어 유럽에서 알게 되었다.

  시작은 립밤이었다. 어떤 립밤을 바른 뒤로 입술이 계속 부르트고 부어올랐다. 처음엔 건조한 건가 싶어서 립밤을 좀 더 열심히 발랐다. 그랬더니 입술이 달려라 하니의 고은애씨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 뒤로 비슷한 일을 한두 번 더 겪었는데, 원인은 모르지만 뭔가 바르면 안 되는 것이 있구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때쯤 대학교 3학년이 되었고, 유럽 여행을 가게 되었다.


  따가운 유럽의 여름 햇살에 대비하여, 나는 자외선차단제를 하나 새로 샀다. 처음 써보는 제품이었지만 나름 추천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무방비 상태로 여행을 즐길 준비만 했던 나는, 새 자외선차단제와 함께 온몸이 얼룩덜룩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독일에서는 병원을 찾아 나섰는데, 효과가 전혀 없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옥시벤존이라는 성분이 들어간 제품을 바르고 야외에 나가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다. 바르고 피부가 뒤집어졌던 제품들의 전 성분을 집요하게 비교해 본 결과 옥시벤존이 교집합이자 알레르기 유발 성분이었다. 그 이후 옥시벤존이 없는 자외선차단제만 썼더니, 역시나 괜찮았다.

 

  변비는 피부가 뒤집힌 것보다 훨씬 더, 몇 배는 힘들었다.

  슬프게도 이 친구 역시 유럽에서 찾아왔다. 평생 1분 컷으로 쾌변을 해왔기에 여행을 갈 때 변비약을 챙겨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랫배는 빵빵해지는데 화장실을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다. 과일이나 요거트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급기야 베네치아에 도착해서는 관광이고 뭐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유럽에 도착함과 동시에 차곡차곡 뱃속에 쌓아온 친구들이 서로 나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도저히 꺼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의 은인이 바로 로마의 민박집 사장님이셨다. 그분이 아직도 로마에서 민박집을 하신다면, 그리고 로마에 또 갈 수 있다면, 꼭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다 죽어가는 나를 안타깝게 여기신 사장님께서는 체크인 날 물(뭔가 특별한 것이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과 함께 한국산 변비약을 내어주셨다.

  그 약을 먹은 밤, 화장실에서 축제가 일어났다! 가뿐한 몸으로 다음 날 여행을 하고, 한국식 카레밥과 김치를 먹는데 얼마나 행복하던지…. 유럽을 다녀온 지 10년도 넘게 흘렀고, 로마를 떠난 이후 그 변비약은 한 번도 먹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TV에서 그 변비약 광고를 보면 지금도 반가운 마음이 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베네치아

 



  세 번째 친구 기관지염은 태평양 건너 뉴욕에서 만난 여행 메이트였다. 아니, 한국에서부터 데리고 갔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한겨울의 뉴욕 여행을 앞두고, 떠나기 며칠 전부터 애매한 감기 기운이 느껴지면서 기침이 시작되었다. 평소 같으면 병원에도 안 갔을 텐데, 여행을 앞두고 있으니 빨리 낫고 싶어서 일부러 진료도 받고 약도 받았다. 한 이삼일이면 뚝 그칠 줄 알았던 기침은 약을 먹어도, 따뜻한 물을 배부르게 마셔도 낫질 않았다.

  뉴욕은 숙박비가 너무나 비싼 도시였다. 우리 일행 셋은 숙소의 위치를 우선순위로 선택한 대신 방의 컨디션을 버렸다. 셋이 동시에 짐 정리도 할 수 없을 만큼 좁은 방에서 붙어서 잤는데, 나는 여행을 온 열흘 내내 그 방에서 폭풍 기침을 해댔다.

  출발 전 처방받은 약은 진작 다 먹었고, 영어 때문에 떨면서도 약을 사 먹었는데, 도대체 왜 기침은 멈출 생각을 안 하는지. 나는 밤새 기침이 나올 때마다 친구들에게 미안했고, 한 번 기침을 시작하면 머리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어찌저찌 알게 된 나의 정확한 병명은 기관지염이었다. 물론 기관지염 역시 이후에는 한 번도 앓은 적이 없다.

아파도 기어코 올라갔던 겨울의 엠파이어스테이트

   



  사람 일이란 알 수 없기에 건강 자랑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긴 하다. 그래도 그렇지, 평소 잔병치레 없이 튼튼한 내가 여행지에서 겪은 3종 세트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며 유럽이나 뉴욕에는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제대로 누리지 못한 여행지들을 떠올리면 아쉽지만, 이제는 추억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에피소드들이 있었기 때문에 뚱이를 데리고 여행을 갈 때에는 컨디션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된다. 어른은 쉽게 털고 일어날 가벼운 질병들도 아이들은 세게 앓을 수 있기에 유난 아닌 유난을 떨게 된다.

  네 살 초여름에 코로나에 걸렸던 뚱이가 체력을 회복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던 것을 생각하면, 엄마로서 긴장을 안 할 수가 없다. 늘 뛰어놀기 좋아하고 씩씩했던 뚱이는 코로나 이후 자주 아팠고, 자주 피곤해했다. 그 회복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마음 아픈 일이었다.


  뚱이는 이제 낮잠을 자지 않는 여섯 살 언니다. 밤잠을 푹 자고 일어나면 충전이 완료되는 쌩쌩한 배터리를 갖고 있는 아이다. 그에 비해 커피로 틈틈이 체력을 수혈해야 하는 낡은 배터리를 가진 엄마 아빠는 주말을 앞두고 늘 각오를 해야 한다.

  뚱이의 무한 체력이 감당이 안 되다가도, 아팠던 재작년을 떠올리면 감사하게 된다. 이제는 신나게 놀 준비가 된 딸을 데리고 어디를 여행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가오는 겨울에는 캐리어에 상비약다운 상비약과, 어린이 홍삼, 비타민C, 또 뭘 챙겨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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