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는 글
여행을 기다리며
싱가포르행 마일리지 표를 선점하려다 보니 출발이 일 년이나 남은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우연히 글을 쓰게 시작하게 되었고, 그 시간이 참 즐거웠다. 쓰다 보니 쓰고 싶은 이야기가 점점 많아졌다. 급하게 써 내려간 글 중 출퇴근과 육아에 쫓기며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글들은, 퇴고하며 그냥 묻어두기도 했다. 언젠가 다시 꺼내서 찬찬히 다듬어보고 싶다.
여행기는 쓰고자 하는 내용이 비교적 명확하다. 다녀온 여행에 대하여 쓰면 되니 말이다. 그러나 ‘여행을 앞둔 이의 글’을 쓰며 처음엔 무엇을 쓰고 싶은 것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 많이 헤맸다. 그렇게 되는 대로 무작정 쓰다 보니 마음속의 수다들이 좀 정리가 되어 갔다. 그렇게 때로는 지난 여행을 추억하기도 했고, 문득 여행에 대한 어떤 물건이 떠올라 글을 쓰기도 했다.
쓰고 싶었으나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글 중에는 7년이나 지난 신혼여행 이야기도 있고, 마카오의 카지노에서 2000원을 벌었던 이야기도 있다. 글쓰기가 이렇게 재밌는 일이었다니!
나의 버킷리스트, 바티칸
여행을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엄마가 많이 생각났다. 내가 엄마와 단둘이 갔던 여행은 직장인이 된 이후 대만에 다녀온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글을 쓰며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차곡차곡 쌓아 온 여행지의 추억들은 엄마가 없었다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예능 프로그램에 추기경님이 나오신 것을 보게 되었고, 버킷리스트가 하나 늘었다. 가톨릭 신자인 엄마를 모시고 바티칸에 꼭 가야겠다고 말이다. 로마까지 가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다. 돈, 시간, 사전 준비 등 많은 것이 필요한 프로젝트다.
고맙게도 이 프로젝트를 듣자마자 남편이 적극적으로 찬성해 주었다. 엄마한테 신경 좀 많이 쓰라며, 우선순위인 일을 할 때는 너무 많이 고민하지 말고 과감하게 결정을 내리라는 말과 함께.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뚱이가 10시간 정도의 비행을 소화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엄마의 무릎이 하루라도 더 씩씩할 때 바로 로마로 떠날 것이다. 만약 그때도 지금처럼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면, 우리 모녀 3대의 이탈리아 일주를 기쁜 마음으로 기록하고 싶다.
초콜릿 공장의 꼬마 요리사
뚱이는 원데이 클래스 수업을 좋아한다. 물론 내가 뚱이의 취향과 능력을 고려하여 세심하게 수업을 선정하기에 적중률이 높은 것이긴 하다. 몇 번의 경험들이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던 덕분인지, 뚱이는 체험수업에 가자고 하면 반응이 좋은 편이다. 무엇을 하러 가는 것인지 관심을 갖고 기대한다.
지난 북해도 여행에서는 초콜릿 공장에서 진행하는 초콜릿 파이 만들기 수업을 신청했었다. 커다란 요리사 모자를 쓰고 진지하게 초콜릿을 붓는 뚱이는 너무나 귀여웠다. 파이 장식을 하다 유산지에 붙은 초콜릿 조각을 떼어서 키득거리며 먹은 일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파이 만들기처럼 여행 중 겪는 새로운 경험들이 뚱이의 세계를 넓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꼬마 요리사가 된 뚱이는 앞치마를 입고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다가도, 실습이 시작되니 진지하게 도구를 살펴보았다. 베이킹을 할 때 쓰는 알록달록한 스프링클을 보고서는 신기한지 먹어도 되는 것이냐고 묻기도 했었다. 먹어도 되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아주 아낌없이 파이 위에 부어주었다.
원래도 자기가 만든 미술 작품에 애착과 자부심이 대단했던 뚱이는, 그 파이 상자를 그대로 한국까지 고이 가져왔다. 너무 아까워서 냉장고에 보관만 하다가 결국은 제대로 먹어보지는 못했다는 아이러니한 결말로 끝났지만, 먹기 아까운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이 끝나자마자 일상으로 복귀하며 그대로 휘발되는 기억이 있다. 반면에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일도 있는 것 같다. 작은 것이어도 뚱이가 특별히 좋아했거나 힘들어했던 것은 부모인 우리에게도 인상 깊게 남는다. 외국 친구들과 어울려 멋지게 간식을 만드는 꼬마 요리사를 상상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뚱이가 종이컵 통째로 콸콸 붓던 스프링클인 것처럼 말이다.
뚱이가 기대하는 것
여름이 지나고 보니 이제 싱가포르 여행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반년 남짓 남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한 계절만 지내면 출국이다. 나는 각종 입장권 예약부터 자질구레한 준비물 리스트를 작성하는 중이다. 내가 볼 엑셀 파일을 만들며 이번에는 무려, 뚱이를 위한 작은 리플렛도 하나 만들고 있다.
리플렛을 만들며 새로운 사실도 하나 알게 되었다. 사전에 신청하는 기내식 옵션 중에는 유아식도 있다고 한다. 비행기를 타면 맥주나 와인에만 관심이 있었지, 어린이들이 뭘 먹는지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뚱이에게 말해주며 사진을 보여주니 눈이 동그래졌다. 유아식을 신청하면 작은 간식 꾸러미도 받을 수 있는데, 그 구성이 참으로 뚱이 취향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뚱이가 이번 여행에서 기대하게 된 것들은 비행기에서 먹는 간식, 물놀이 정도가 되었다. 엄마인 나는 말할 것도 없이 여행이라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설레고 두근거린다. 여행을 가는 즈음에는 한 해 동안 해온 업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시점이니, 이번 여행을 통해 털어낼 것은 털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나에게 무엇보다도 설레는 것은, 돌아오는 겨울에는 여행에세이를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여행을 준비하며 여행을 주제로 글을 쓰는 시간이 있었기에 더 즐거웠고, 더 행복했다. 이제는 서늘한 밤공기를 만끽하며 더 많이 ‘읽는’ 가을을 보내려고 한다.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행복한 가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