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배송된 단잠
먹, 놀, 잠! 육아의 3대 요소다. 아이를 키울 계획이 있다면 밑줄을 쫙 그어 놓고 기억해 두어야 하는 단어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 기약할 수 없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이 세 글자의 노예가 될 테니 말이다.
집집마다 고민의 유형이나 정도는 좀 다르겠으나, 6살 뚱이를 키우는 우리집 역시 아직 먹·놀·잠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먹! 꽤 많이 키운 것 같은데도 아직 엄마 아빠와 같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 놀! 무슨 놀이든 엄마와 함께, 혼자 그림을 그리더라도 꼭 엄마가 앞에서 봐줬으면 하는 아이가 바로 뚱이다. 외동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야지 싶다. 그리고 잠! 우리 뚱이는 태권도에 다닌 이후로는 9시면 졸린 눈을 비비지만, 꼭 이 말을 한다. “엄마, 난 잠이 안 와….”
나로 말하자면 결혼 전에는 무제한으로 잠을 자는 것이 가능했던 사람이다. 한 번은 내가 어디 여행을 다녀온 뒤 엄마가 방문을 열어보실 때마다 계속 자고 있었다고 한다. 배 아파 낳아서 키운 딸이지만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엄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코에 손을 대 보셨다고 들었다.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기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뚱이가 신생아였을 적에는 보통의 초보 부모들처럼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 평생 숙면을 취하다가 몇 달간 토막잠을 자려니 피곤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비교적 순탄하게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은 빠르게 포기하는 단순한 사람이다. 내가 머리 싸맨다고 뚱이가 갑자기 잘 자는 것은 아니므로, 그 상황을 그냥 받아들였다. 너무 힘들어서 한계에 다다르게 될 쯤이면 때마침 뚱이가 신생아에게 주어진 퀘스트를 하나씩 깨주었다. 이따금 피곤과 짜증이 눈덩이처럼 굴러오는 날도 있었지만, 시간이 흘렀다.
문제는 바로 지금이다. 신생아도 아닌데! 태권도도 다녀왔는데! 너는 왜 매일 잠이 안 온다는 것이냐.
잠은 여전히 우리집에서 큰 이슈다. 우리는 혼자 자기 무섭다는 뚱이를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아직 분리 수면을 시도도 해보지 못했다. 남편은 침대에서, 나와 뚱이는 그 아래에 매트와 이불을 깔고 잔다. 두 털뭉치들은 왔다 갔다 하는 편이지만, 숲이는 뚱이 발밑, 가을이는 아빠 바로 옆이 고정석이다.
가뜩이나 수면의 질이 낮은 남편은 이런 환경에서 하룻밤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한다. 뚱이가 잠꼬대를 할 때, 가을이가 이불을 열어주라며 울고 긁어댈 때면 여지없이 깨서 한참을 방황해야 한다. 아침마다 퀭한 눈을 볼 때면 짠하고 마음이 아프다.
그러던 어느 저녁, 우리 가족은 뚱이가 잠이 안 오는 이유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6살이 되어 영어학원에 다니게 된 뚱이는, 예쁜 영어 이름도 하나 받았다. 뚱이는 그 이름을 너무 좋아한다.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스텔라(Stella)’다. 뚱이는 스텔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집에서도 자기를 스텔라라고 소개하며 놀 때가 종종 있다. 장난감 마이크를 쥐고 “안녕하세요! 저는 방금 미국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스텔라예요! 지금부터 멋진 노래를 시작할게요.”라며 윙크를 하는데, 정말 이름대로다. 반짝반짝 빛난다.
며칠 전, 뚱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갔을 때였다.
뚱이와 나는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에 가면 각자 책을 고른다. 뚱이는 아직 한글을 유창하게 읽지 못하기에 책 표지 그림이나 순간의 느낌으로 대출 여부를 판단한다. 그렇게 고른 책을 대출 권수 한도만큼 쌓아서 집에 빌려오면 엄마는 최선을 다해 읽어준다.
뚱이가 느낌대로 책을 고르는 동안, 나도 책을 고른다. 뚱이의 취향과 장르의 밸런스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선택한다. 그런데! 눈에 딱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다. ‘스텔라의 도둑맞은 잠’이라는 책이었다. 아니, 잠 안 자는 스텔라가 또 있었다니!
그날 저녁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이야기 속 스텔라는 엄마의 재택근무로 인해 아빠와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다. 아빠는 동화책을 읽고 또 읽고, 무려 9권이나 읽어주셨다. 그런데도 스텔라의 눈은 말똥말똥하다. 뭐지, 이 익숙한 상황은?
이 책의 줄거리는 여기부터 놀라워진다. 아빠가 어디에 전화를 걸더니, 주문한 ‘단잠’이 왜 안 오냐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전화 받은 상대방의 반응. 단잠을 보냈는데 다른 사람이 받았단다. 현대 사회에서 택배 오배송이라니! 있어서는 안 되는 가슴 철렁할 전개다.
아빠와 스텔라, 스텔라의 장난감 친구들은 탐정이 되어 오배송된 단잠을 찾아 나선다. 집 안 구석구석을 뒤졌으나 단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단 하나, 엄마가 재택근무 중인 방뿐. 엄마가 방해하지 말라고 문패까지 걸어놨건만 남은 곳은 이 방뿐이기에 할 수 없이 문을 열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라더니, 단잠은 엄마한테 배송된 것이었다. 일해야 한다던 스텔라네 엄마는 책상에 엎드려 꿀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자기 전에 읽는 책은 너무 재밌고 흥미진진해도 안 되는 걸까. 우리 집 스텔라는 이 책을 그날 연속해서 세 번이나 읽었고, 자기도 잠이 다 깨버렸다는 폭탄선언을 날렸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자기가 못 받은 단잠은 어디로 갔는지 탐정 놀이까지 시작할 기세였다.
나의 이성은 여기서 뚱이를 멈추고 차분하게 잘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장난기를 가득 담은 눈과 입이 먼저 남편을 향해 움직였다. “자기야! 그러니까 단잠을 잘 배송시켜야지. 주소를 잘못 적어서 뚱이가 단잠을 도둑맞았잖아!”
엄마의 이 멘트를 신호로 뚱이는 놀 준비가 완료되었다. 역시 늘 내 입이 방정이다. 고통받는 건 소등해야 할 시간에 갑자기 신나서 탐정이 된 두 여자를 바라보는 뚱이 아빠다. 피곤한 눈으로 “야, 너네들 안 자냐?”를 작게 외쳐 보지만 소용이 없다.
오늘의 교훈. 택배로 뭔가 주문할 때는 받는 사람을 정확히 잘 적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