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정말 어려워
뚱이를 키우며 김밥을 많이도 먹었다.
돌 이전의 전쟁과도 같은 시기에는 나를 위해 뭔가 차려 먹는다는 것도 사치였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아기를 키운 주변의 엄마들을 보니 대체로 김밥파와 국밥파로 나뉘는 듯하다. 나는 김밥을 더 좋아하기도 했고, 접시도 수저도 없이 오며 가며 손으로 하나씩 먹을 수 있어서 김밥을 선호했다.
환절기 털갈이 시즌에는 김밥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잠깐 자리를 비우면, 하얀색 고양이 털이 고명처럼 붙어있기도 했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야무지게 은박지를 봉해놓지 않은 내 실수인걸. 그리고 이쯤 집사 생활을 하면 그 정도는 그냥 털고 먹는다.
이렇게 글로 써보니 좀 처량한가 싶기도 하지만, 그때는 하루하루에 대한 비관적인 감상을 남길 새도 없이 바쁘게 시간이 지나갔다. 영아기의 주 양육자들은 누구든 크고 작은 우울을 버텨내며 이 시기를 보낼 것이다. 나 역시 새벽에 문득 눈물이 나는 날도 있었고, 1시간만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마음의 허기짐은 위장 상태와 별개였다. 늘 입맛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배가 고팠다. 수유를 해야 하니 잘 먹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래도 좀 짭짤하고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마음이 적절하게 합의를 본 음식이 ‘김밥’이었다. 동네에 김밥집도 많고 가격도 저렴하니 참 고마운 음식이었다.
나는 ‘요알못’ 엄마다. 그간 남긴 업적으로는 한강 수준의 물 많은 라면과 볶음 수준으로 물이 적은 라면을 연달아 내놓은 적이 있으며, 전기밥솥으로 과자도 누룽지도 아닌 돌 같은 밥을 만들어낸 일도 있다. 결혼 전에 손에 물 한 번 안 묻혀 본 귀한 딸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릴 적부터 대식구의 밥을 해 먹이셨던 우리 엄마는 내가 자라는 내내 소망하셨다. 내가 집안일을 유능하게 하는 주부보다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직업인으로 살길 말이다. 그 바람만큼 정말 아무것도 안 시키셨다.
엄마의 그런 바람이 없었더라도 나는 타고나길 집안일에 소질도 관심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게을렀다. 집안일이란 부지런해야 하는 법이다. 늘 쓸고 닦고 식재료를 다듬고, 할 일이 무한대로 생성된다. 직장에서의 업무는 마감이란 게 있는 법인데, 집안일은 하나 끝내고 뒤 돌면 다른 하나가 다시 시작된다. 전업주부로 윤이 나게 집을 유지하고 늘 신선한 재료로 몇 번이고 상을 차려내시는 분들은 정말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아무리 하기 싫고 소질이 없는 일이라도, 사람은 변화된 환경에 맞춰 나를 바꿔나가야 할 때가 있다. 나는 남편보다 퇴근이 한두 시간쯤 빠르고, 내 일상의 모토는 ‘대충 빨리’다. 칼 각으로 집 안을 정리하진 못하지만, 내 선에서 가능한 것들은 남편에게 남겨두지 않고 퇴근하자마자 후루룩 해치우는 편이다. 요리도 그러다 보니 조금은 늘었다. 치솟는 외식비와 엥겔지수를 되새기며 어떻게든 한 끼씩 차리다 보니 이제는 먹을만한 음식도 많다.
이렇게 의무감과 실패로 점철된 나의 요리 성장기에 유일하게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메뉴가 있었다. 바로 김밥이다. 나는 이렇게 이유 없이 꽂혀서 나와의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 것들이 가끔 있다. 누구도 원하지 않고 관심 없는 나만의 도전이다!
김밥과의 전쟁을 시작하게 된 것은 뚱이가 서너 살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소 김밥이 질기다며 안 먹었던 뚱이가, 그날은 놀이터에서 김밥 한 줄을 거의 다 먹었다. 뚱이 친구의 이모님이 간식으로 사다 주신 김밥이었는데, 아이들 먹을 거라 좀 얇게 썰어달라고 하셨다면서 뚱이에게도 나눠주셨다. 당연히 한 입 예의상 먹고 안 먹겠지 싶었는데, 뚱이는 너무 맛있다면서 더 먹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아니, 왜, 넌 언제부터 김밥을 좋아한 건데?
김밥이 보기엔 별것 아닌 음식 같지만, 막상 만들어보면 품이 많이 드는 음식이다. 한두 번 실패해 보니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나의 경우 열심히 검색도 하고 김밥 마니아들이 모인다는 카페에 가입해서 김밥 고수들의 사진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내가 겪은 시행착오는 너무 많지만,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1. 질기지 않은 김을 찾아 헤매는 과정 - 질기면 공주님이 안 씹힌다며 수저를 내려놓으신다. 시중에 판매되는 많은 종류의 김을 써봤는데, 우리 집에 정착한 김은 조미된 김밥 김이다. 그냥 반찬으로 먹어도 맛있다.
2. 적당한 찰기의 밥을 만나기 위한 과정 - 너무 진밥이면 떡이 되어 버리고, 너무 된밥이면 말면서 이미 망했다는 게 느껴진다. 밥알이 다 흩어지며 각자 논다. 사실 햇반으로 쌌을 때 제일 완벽했다.
3. 속 재료의 합을 찾아가는 과정 – 뚱이가 좋아하는 재료는 맛살, 내가 좋아하는 재료는 우엉이나 당근처럼 씹히는 것, 남편이 좋아하는 재료는 김치다. 여기에 계란이나 단무지처럼 필수 재료들도 넣으면서 뚱이가 한입에 먹을 수 있는 굵기로 싸야 한다. 취향에 맞게 이것저것 싸려다 보면 세 명이 두 끼는 먹을 만큼 여러 줄을 싸게 되고, 자연히 김밥을 먹은 바로 다음 끼니는 무조건 김밥 전을 먹어줘야 한다.
값싸고 흔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인 만큼 사 먹으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이상하게 김밥만큼은 꼭 내가 직접 만들고 싶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도전 정신을 가진 나 때문에 남편과 뚱이는 주기적으로 김밥을 먹어야 한다. 그래도 내가 만든 거라면 일단 맛있게 먹어주려고 노력하니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일이다.
이번 봄에, 그간의 모든 노하우를 모아서 뚱이의 유치원 소풍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주었다. 주먹밥이나 볶음밥을 말하면 원하는 것으로 싸주려고 했더니, 뚱이가 김밥을 먹고 싶단다. 그럼 당연히 싸야지!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싸면서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요리를 하면서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감정인데, 그날은 참 행복했다. 글을 쓰다 보니 또 김밥이 먹고 싶다.
하나 더. 전주의 오래된 맛집 중 고추장 불고기와 심심한 야채김밥을 상추에 싸 먹는 집이 있는데, 조합이 최고다. 쉬워 보이는데 왜 집에서는 이 맛이 안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