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가지는 무게
뚱이는 말이 느린 아이였다. 두 돌까지도 발화 가능한 낱말이 많지 않았다. 영유아 검진 때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서면, 늘 비슷한 말씀을 듣고 나왔다. 지금 상태는 조금 애매하긴 한데, 다음 검진 때도 이 정도 발달이라면 좀 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식의 진단이었다.
아기를 키우는 것도 처음이고 주변에서 직접 볼 수 있는 아기도 별로 없었던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하기가 어려웠다. 영유아 검진 결과는 착잡했지만, 두 가지를 근거로 막연히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먼저 이 시기에는 표현 언어 못지않게 수용 언어도 중요한데, 다행히 말귀는 좀 알아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보다는 느렸지만 뚱이에게도 점진적인 변화가 꾸준히 있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휴직 중이었던 내가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매일 뚱이가 내뱉은 새로운 낱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남편이 퇴근하면 속사포처럼 전해주었다. 엄마만 느낄 수 있는 뚱이의 작은 성장은 매일매일 큰 기쁨이었다.
27, 8개월쯤이었을까. 감사하게도 뚱이는 두 돌하고도 한 계절이 지났을 무렵부터 갑자기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러다 곧 대화가 가능해졌고, 이후에는 말을 잘하는 아기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언제 무슨 말을 해줄까 애타게 기다리던 마음은 나와 남편의 기억에만 희미한 잔상으로 남았다.
뚱이가 말이 느린 아기였던 시절, 나 역시 다른 엄마들처럼 나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지난 일상을 복기했다. 2년 동안 내가 너무 조용한 엄마여서, 그래서 인풋이 부족했던 걸까? 그러나 휴직 중이었던 내 일상은 마치 독백극과 같았다. 대답 없는 뚱이에게 끝없이 혼자 말을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충분히 최선을 다한 엄마였다. 그런데도 뚱이가 말이 늦는 것이 나 때문이 아닐까 오랜 시간 자책했다.
이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아이가 갖고 있는 문제나 어려움을 본인에게서 찾는 엄마들을 만나면 마음이 아프다. 어떤 일은 노력과는 상관없이 랜덤으로 찾아오기도 하니 말이다.
엄마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외계어를 사용하던 뚱이가, 잠깐 사이에 말하는 아기가 되었다. 그즈음의 뚱이는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하며 자주 엄마 아빠를 놀라게 했다. 그때 겪었던 에피소드 중 나에게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앞뒤 상황은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뚱이에게 무언가를 훈육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있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때 뚱이가 나에게 한 말 만큼은 세월이 흘렀어도 정확하게 기억난다.
나한테 ‘니가’라고 하면 안 되잖아.
아무래도 내가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저렇게 저렇게 되잖아.”라는 식의 잔소리를 힐난조로 늘어놓고 있었나 보다. 머리숱도 별로 없고 기저귀도 차고 있는 진짜 ‘아기’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니. 애니메이션 ‘보스베이비’의 한 장면 같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뚱이에게 차가운 말투와 부당한 잔소리에 대해 사과했다. 물론 세 돌에 어울리는 언어로.
이 어이없으면서도 뜨끔했던 추억은 이후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뚱이가 자라며 사랑을 많이 받고, 그 넘치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기꺼이 나눠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랐다. 뚱이가 그런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매일 우리에게 듣는 말, 우리에게 받는 배려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아기들도 엄마의 말투와 눈빛으로 많은 것을 읽는 법인데, 미안했다. 분명 뚱이가 한 일은 큰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완벽하게 정제된 말과 행동을 늘 유지할 수 있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항상 훌륭한 엄마는 아닐지라도 그 후로 뚱이에게 큰 잘못이나 실수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며칠 전에 뚱이 앞에서 했던 어떤 말은 할 수만 있다면 도로 주워 담고 싶었다.
이번에도 문제는 결국 나였다.
뚱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는 한 주간 활동한 사진을 모아서 전송해 주신다. 얼마 전에는 한글로 무언가를 써서 완성하는 활동을 했는데, 엄마 눈에 뚱이의 글씨는 거의 한석봉이었다. 아니, 우리 딸이 이렇게 글씨를 잘 쓴다니! 난 놀랐고, 기뻤고, 자랑스러웠다.
이 들뜬 마음을 뚱이에게 어떻게 전달하면 좋았을까? 우리 뚱이가 그동안 엄마한테 편지도 써주고 열심히 연습하더니 이제는 실력이 많이 늘었네, 하고 뚱이의 부단한 노력을 칭찬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두 가지나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뱉었다. 하나는 우리 뚱이가 반에서 글씨를 ‘제일’ 잘 쓰는 것 같아, 라고 한 점이다. 그보다 더 최악은 뚱이와 나란히 사진 찍은 친구의 작품을 보면서 00이는 왜 이렇게 못 썼냐고 한 점이다. 하….
글로 쓰고 보니 훨씬 더 창피하다. 한석봉을 낳은 기쁨에 취해 혼자서 칭찬 아닌 칭찬을 떠들어 대고 있는 나에게, 옆에서 보고 계시던 엄마가 말씀하셨다.
딸, 뚱이 앞에서 그런 비교는 좀 자제하는 게 좋지 않겠어?
라고 말이다. 순간 얼굴이 뜨거웠다.
칭찬받고 인정받길 좋아하는 뚱이는 엄마가 ‘제일’ 잘했다고 한 말을 앞으로 은근히 신경 쓸지도 모른다. 아직 글씨가 서투른 옆 친구에게는 배려나 도움이 아닌 평가나 지적을 먼저 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은 역시, 나 때문이다. 낯 뜨거운 엄마의 실수는 잊어주길 바라며, 오늘도 뚱이에게 고운 말과 선한 마음씨를 가르쳐줄 수 있는 더 나은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엄마가 실수를 얘기하고 사과하면 흔쾌히 받아주며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주는 우리 뚱이. 수행이 부족한 엄마에 비해 우리 뚱이는 너무 멋진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