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뚱이네 Sep 11. 2024

나한테 니가라고 하면 안 되잖아

말이 가지는 무게

  뚱이는 말이 느린 아이였다. 두 돌까지도 발화 가능한 낱말이 많지 않았다. 영유아 검진 때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서면, 늘 비슷한 말씀을 듣고 나왔다. 지금 상태는 조금 애매하긴 한데, 다음 검진 때도 이 정도 발달이라면 좀 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식의 진단이었다.

  아기를 키우는 것도 처음이고 주변에서 직접 볼 수 있는 아기도 별로 없었던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하기가 어려웠다. 영유아 검진 결과는 착잡했지만, 두 가지를 근거로 막연히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먼저 이 시기에는 표현 언어 못지않게 수용 언어도 중요한데, 다행히 말귀는 좀 알아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보다는 느렸지만 뚱이에게도 점진적인 변화가 꾸준히 있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휴직 중이었던 내가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매일 뚱이가 내뱉은 새로운 낱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남편이 퇴근하면 속사포처럼 전해주었다. 엄마만 느낄 수 있는 뚱이의 작은 성장은 매일매일 큰 기쁨이었다.

    

  27, 8개월쯤이었을까. 감사하게도 뚱이는 두 돌하고도 한 계절이 지났을 무렵부터 갑자기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러다 곧 대화가 가능해졌고, 이후에는 말을 잘하는 아기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언제 무슨 말을 해줄까 애타게 기다리던 마음은 나와 남편의 기억에만 희미한 잔상으로 남았다.

  뚱이가 말이 느린 아기였던 시절, 나 역시 다른 엄마들처럼 나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지난 일상을 복기했다. 2년 동안 내가 너무 조용한 엄마여서, 그래서 인풋이 부족했던 걸까? 그러나 휴직 중이었던 내 일상은 마치 독백극과 같았다. 대답 없는 뚱이에게 끝없이 혼자 말을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충분히 최선을 다한 엄마였다. 그런데도 뚱이가 말이 늦는 것이 나 때문이 아닐까 오랜 시간 자책했다.

  이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아이가 갖고 있는 문제나 어려움을 본인에게서 찾는 엄마들을 만나면 마음이 아프다. 어떤 일은 노력과는 상관없이 랜덤으로 찾아오기도 하니 말이다.     

   



  엄마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외계어를 사용하던 뚱이가, 잠깐 사이에 말하는 아기가 되었다. 그즈음의 뚱이는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하며 자주 엄마 아빠를 놀라게 했다. 그때 겪었던 에피소드 중 나에게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앞뒤 상황은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뚱이에게 무언가를 훈육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있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때 뚱이가 나에게 한 말 만큼은 세월이 흘렀어도 정확하게 기억난다.

나한테 ‘니가’라고 하면 안 되잖아.

  아무래도 내가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저렇게 저렇게 되잖아.”라는 식의 잔소리를 힐난조로 늘어놓고 있었나 보다. 머리숱도 별로 없고 기저귀도 차고 있는 진짜 ‘아기’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니. 애니메이션 ‘보스베이비’의 한 장면 같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뚱이에게 차가운 말투와 부당한 잔소리에 대해 사과했다. 물론 세 돌에 어울리는 언어로.

  이 어이없으면서도 뜨끔했던 추억은 이후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뚱이가 자라며 사랑을 많이 받고, 그 넘치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기꺼이 나눠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랐다. 뚱이가 그런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매일 우리에게 듣는 말, 우리에게 받는 배려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아기들도 엄마의 말투와 눈빛으로 많은 것을 읽는 법인데, 미안했다. 분명 뚱이가 한 일은 큰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완벽하게 정제된 말과 행동을 늘 유지할 수 있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항상 훌륭한 엄마는 아닐지라도 그 후로 뚱이에게 큰 잘못이나 실수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며칠 전에 뚱이 앞에서 했던 어떤 말은 할 수만 있다면 도로 주워 담고 싶었다.


  이번에도 문제는 결국 나였다.

  뚱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는 한 주간 활동한 사진을 모아서 전송해 주신다. 얼마 전에는 한글로 무언가를 써서 완성하는 활동을 했는데, 엄마 눈에 뚱이의 글씨는 거의 한석봉이었다. 아니, 우리 딸이 이렇게 글씨를 잘 쓴다니! 난 놀랐고, 기뻤고, 자랑스러웠다.

  이 들뜬 마음을 뚱이에게 어떻게 전달하면 좋았을까? 우리 뚱이가 그동안 엄마한테 편지도 써주고 열심히 연습하더니 이제는 실력이 많이 늘었네, 하고 뚱이의 부단한 노력을 칭찬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두 가지나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뱉었다. 하나는 우리 뚱이가 반에서 글씨를 ‘제일’ 잘 쓰는 것 같아, 라고 한 점이다. 그보다 더 최악은 뚱이와 나란히 사진 찍은 친구의 작품을 보면서 00이는 왜 이렇게 못 썼냐고 한 점이다. 하….


  글로 쓰고 보니 훨씬 더 창피하다. 한석봉을 낳은 기쁨에 취해 혼자서 칭찬 아닌 칭찬을 떠들어 대고 있는 나에게, 옆에서 보고 계시던 엄마가 말씀하셨다.

 딸, 뚱이 앞에서 그런 비교는 좀 자제하는 게 좋지 않겠어?

  라고 말이다. 순간 얼굴이 뜨거웠다.


  칭찬받고 인정받길 좋아하는 뚱이는 엄마가 ‘제일’ 잘했다고 한 말을 앞으로 은근히 신경 쓸지도 모른다. 아직 글씨가 서투른 옆 친구에게는 배려나 도움이 아닌 평가나 지적을 먼저 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은 역시, 나 때문이다. 낯 뜨거운 엄마의 실수는 잊어주길 바라며, 오늘도 뚱이에게 고운 말과 선한 마음씨를 가르쳐줄 수 있는 더 나은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엄마가 실수를 얘기하고 사과하면 흔쾌히 받아주며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주는 우리 뚱이. 수행이 부족한 엄마에 비해 우리 뚱이는 너무 멋진 딸이다.

근데 정말 잘쓰죠
이전 17화 서울에서 아이를 키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