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6일
<그리스 로마 신화>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숙제도 없길래 가정체험학습으로 책을 읽기로 하였다. 원래는 친척 집에 가려고 했는데 그냥 집에서 평소에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책 이름은 그리스 로마 신화였는데, 그 책에는 평소에 내가 읽고 싶었던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우리가 만화로 보거나, 들어서 흔히 알고 있던, 제우스나 헤라클레스부터 사냥의 신, 땅의 신 등등. 정말 읽을거리도 많고, 책의 내용도 이야기로 꾸며져서 지루하지가 않았고, 친척 집에 가서 친척 동생들이랑 즐겁게 노는 것만큼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냥 계획대로 친척 집에 가는 것도 재밌었겠지만, 나는 오늘도 뜻깊게 보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한가한 일요일에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유익한 것인 것 같다. 다음에도 좋은 책을 계속 많이 읽도록 노력해야겠다.
혹시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제우스, 헤라클레스는 아는데 놀자스는 누구야?’라고 생각한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놀자스’는 우리 뚱이, 여섯 살 난 내 딸이다. 뚱이는 왜 놀자스가 되었을까? 이름 그대로다. 엄마 아빠에게 하루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놀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불멸의 고전이다. 23년 전에 열세 살 이었던 나도 읽었고, 여섯 살인 내 딸도 요즘 마르고 닳도록 보고 있다. 뚱이의 상태로 말하자면 토머스 불핀치를 우리 집 명예 가족으로 받아줘야, 아니, 모셔 와야 할 지경이다.
내가 6학년 때 읽었던 것이 어떤 버전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뚱이에게 읽어주고 있는 것은 한국톨스토이에서 출판한 68권짜리 전집이다. 우리 집은 역세권도 스세권도 아닌 도세권에 자리 잡은 덕에, 집값 상승의 혜택은 누리지 못했으나 도서관은 도보로 언제든 오갈 수 있다. 뚱이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우연한 만남도 그렇게 성사되었다.
뚱이에게 처음 그리스 로마 신화로 문을 열어준 것은 나였다. 이걸 다 읽어줘야겠다는 큰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어린이 열람실에 트로이 목마 이야기가 있길래 좋아할까 싶어서 한 권 대출해 온 것이 시작이었다.
트로이 목마에서 시작된 뚱이의 세계는 점점 확장되었다. 트로이 목마에서 아킬레우스의 발목으로, 아킬레우스의 엄마인 테티스에서 헤파이스토스로, 그리고 헤파이스토스를 버린 헤라와 남편인 제우스로 계속 이어졌다. 어느 정도 읽으니 뚱이는 이 거대한 스토리에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엄마는 왜 1권부터 빌려오지 않았느냐는 항의를 했다. 이렇게까지 네 취향일 줄 몰랐지!
이렇게 시작한 그리스 로마 신화는 우리 집을 남유럽으로 만들었다. 요즘 인형 놀이를 할 때는 모든 인형이 한데 모여 올림포스 신전을 만들어야 한다. 최소 열두 신부터 시작인데 인형이 모자라는 바람에 마트에서 미미 인형을 하나 추가로 사 왔다. 놀다가 잠시 쉬며 만화를 볼 때는 EBS의 ‘올림포스의 별’을 정주행하고, 얼마 전에는 뮤지컬 ‘신들의 왕 제우스’를 보러 갔다 왔다. 한 마디로, 딸과 함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덕질하고 있는 기분이다.
우리의 ‘놀자스’는 여기서 탄생했다. 얼마 전 남편과 나, 뚱이가 셋이 차로 어딘가 이동하는 중이었다. 뚱이가 요즘 즐겨 하는 말놀이는 ‘스’로 끝나는 신 이름 대기, ‘헤’가 들어가는 신 이름 대기, 이런 것들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제우스, 헤라클레스, 아르테미스 등등을 엄마와 번갈아 말하는 중이었는데, 뚱이가 더는 생각이 나지 않아 내가 이기려는 참이었다. 그때 남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뚱아, 우리 딸은 맨날 엄마한테 놀자고 하니까 놀자스네? 제우스, 아레스, 놀자스!”
이 말이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놀자스라니! 그래서 뚱이는 우리 집에서 놀이의 여신을 맡게 되었다. 역할에 충실하게 하루 동안 “놀자, 이제 놀자, 언제 놀까?” 등의 대사를 무한대로 해주신다.
방대한 이야기인 만큼 수많은 등장인물이 있지만, 나는 그중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덕분에 가장 많이 웃었다.
하데스는 지하 세계의 왕으로,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지하로 데려간다. 데메테르는 미친 듯이 딸을 찾아다니지만 쉽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딸을 찾아냈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지하 세계의 음식, 석류 네 알을 먹은 죄로 일 년 중 한 계절은 지하에서 하데스와 살아야만 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딸 가진 엄마의 관점으로 보면 너무나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뚱이와 인형 놀이를 하며 이 이야기를 재탄생시켰다. 우리가 바꾼 이야기에서 데메테르는 헤라를 대동하여 지하 세계에 쳐들어간다.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에 있어야 하는 계절이었지만, 딸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기에 기어코 엄마가 스틱스강을 건너고야 만 것이다!
급기야 이야기는 딸을 데리고 지하에서 탈출하려는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없이는 못 사는 다소 연약한(?) 하데스의 갈등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결혼의 여신인 헤라는 중재안을 제시한다.
나(데메테르): 저는 제 딸을 데려가야겠어요! 우리 예쁜 딸을 이렇게 컴컴한 곳에 둘 수는 없다고요!!
뚱(헤라): 좋아요. 그럼 이건 어때요? 지하 세계에서 다 같이 즐겁게 노는 거예요.
나(데메테르): 네?
뚱(헤라): 다 같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건 어때요?
하하하. 이 진지한 대사가 얼마나 웃겼던지, 정말 눈물이 나게 웃었다. 옛날에 주말의 명화를 볼 때나 들었을 법한 외화 더빙 말투로 도도하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라니! 뚱이는 엄마가 놀다 말고 왜 이렇게까지 웃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뚱이의 이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다. 올림포스의 신들도 놀이 몇 가지만 알았더라면 이렇게 박 터지게 싸우진 않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뚱이를 깔깔 웃게 만든 장면 하나를 소개한다. 뚱이의 웃음 버튼은 제우스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바와 같이 제우스는 바람둥이다. 신들의 왕이지만 여기저기 추파를 던지며 민폐를 끼치고 다닌다. 그 모습이 뚱이에게도 좀 하찮고, 어이없고, 우습게 느껴졌나 보다.
어떤 에피소드를 읽으며 제우스가 ‘또’ 첫눈에 반했다는 설명이 나오자, 뚱이가 말했다.
“엄마, 하하하, 제우스가 또 반했어! 역시 제우스가 문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