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 9일
점심을 먹을 때쯤이 되자 엄마가 오늘은 칼국수를 만들어 먹자고 하셨다. 우선 나는 밀가루 3kg과 설탕 1kg을 사 오고 동생은 손이나 씻으라고 하셨다. 내가 밀가루와 설탕을 사 오자 엄마는 뭘 끓이고 계셨고, 밀가루 반죽도 좀 해 놓으셨다. 그것을 보고 동생과 나는 서로 반죽을 하겠다고 하였다. 반죽 하날 갖고 싸우려고 하니까 엄만 그걸 또 반으로 나눠 주셨다. 나중에 합치고 다시 반죽하느라고 엄마만 고생이 배로 드셨다. 근데 특이한 건 반죽 색이 누렇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 하얀 밀가루를 사 왔는데 반죽이 누렇자, 엄마께 여쭸더니 계란을 넣으면 반죽이 누래진다고 하셨다.
어쨌든 반죽을 끝내고 뭘 하나 하였더니 엄마는 큰 상과 큰 몽둥이(?)를 가져오시더니 바닥에 앉아서 반죽에 밀가루를 뿌리면서 막 미셨다. 나중에 정말 헷갈릴 정도로 얇아졌다. 그런데 그걸 또, 밀가루를 뿌리면서 접으시는 것이다. 그리고는 칼로 자르셨다. 그리고 냄비에 넣고 계란도 풀어서 좀 기다리니 완성이 되었다. 면까지 직접 만든거라 그런지 더 맛있었다. 다음에 하면 몽둥이로 미는 것을 한 번 해보고 싶다. 재밌을 것 같으니까!
내 딸 뚱이가 여섯 살 인생에서 최고로 꼽는 음식이 있다. 치킨, 돈가스처럼 어린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인기 있는 음식을 생각하면 안 된다. 뚱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바로, 칼국수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뚱이는 생일날에도, 크리스마스에도, 메뉴를 고를 기회가 있다면 언제나 칼국수를 고른다. 그것도 콕 집어 우리 동네 골목 안쪽, 놀이터 가는 길목에 있는 S 칼국수의 바지락 칼국수를 100%의 확률로 선택한다.
S 칼국수는 뚱이가 인생의 절반을 단골로 다닌 집이다. 자줏빛의 낡은 간판만큼 오랜 세월 장사하신 듯한 사장님께서는, 손주 보듯 뚱이를 귀여워해 주신다. 여름에는 시원한 요구르트를 뚱이에게만 슬쩍 건네주시고, 때로는 사탕을 손에 쥐여주시기도 한다. 뚱이는 이 집의 칼국수 맛뿐 아니라 사장님의 애정과 관심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면 내 카드를 챙겨서는 “잘 먹었습니다!”라는 우렁찬 인사와 함께 계산을 하고 온다.
서넛 되는 테이블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소박한 칼국수 집에서 뚱이는 언제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단돈 팔천 원이면 먹을 수 있는 바지락 칼국수 한 그릇이 뚱이에게는 살면서 먹어본 그 어떤 음식보다도 최고라고 한다. 나는 여름이면 콩국수를 시키고, 쌀쌀해지면 팥칼국수를 먹을 때도 있건만, 뚱이는 언제나 바지락 칼국수다.
딸이 이렇게 좋아한다는데, 집에서 한 번 만들어 주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몇 해 전, 집에서 칼국수를 한 번 끓여본 일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이후로 집에서 다시는 칼국수를 끓이지 않게 되었다.
더닝-크루거 효과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기 시작했을 때, 사람은 내가 유능하다는 생각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다 곧 현실을 깨닫고 절망의 계곡에 빠지게 되고, 실력을 쌓으며 자신감을 조금씩 회복해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위 그래프를 보면 초반에 자신감이 급상승하여 정점을 찍는 지점이 있다. 초보자들이 실력에 비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지점, 이름도 수치스러운 ‘우매함의 봉우리’다. 내가 칼국수를 집에서 끓이던 시점, 나의 요리 실력은 우매함의 봉우리 꼭대기에 있었다고 표현하면 정확할 듯하다.
그즈음의 나는 ‘요리는 정말 드럽게 재미없지만 어렵진 않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밥도 안칠 줄 모르던 초보 주부에서 남편이 좋아하는 매운 찌개류와 뚱이의 유아식을 무난히 차려내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요리에 친숙해지고 있던 나에게 칼국수는 너무 쉬워 보였다. 멸치를 베이스로 호박과 감자를 듬뿍 넣고 끓이면 되는 간단한 국물, 적당한 간, 마트에서 브랜드별로 판매 중인 칼국수 면이면 준비도 과정도 끝인 단순한 요리라고 여겼다.
뚱이에게 기대하라며 호기롭게 시작한 것에 비해 끝은 참 민망하고 어색한 저녁 식사였다. 야채의 익힘 정도나 간은 그렇다 치더라도, 면 상태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S 칼국수의 면은 뚱이와 천천히 먹어도 붇는 법이 없다. 국물도 걸쭉하지 않고 맑고 시원해서 뚱이가 후루룩 마시곤 한다. 그런데! 내 칼국수는 떡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너무 불어서 식감이랄게 없었고 국물은 걸쭉하게 졸아서 마실 게 없었다.
칼국수 대참사 이후 S 칼국수에서 맛있는 칼국수를 먹으며 나의 떡 칼국수를 말씀드렸더니 사장님께서는 빙긋 웃으셨다. 웃음 뒤에는 직접 반죽해서 면부터 뽑으신다면서 맑게 끓이는 요령이 있는 법이라고 덧붙이셨다. 여기서 더 궁금해하면 왠지 영업 비밀을 캐는 듯하여, 더는 여쭤보지 않고 맛있게 한 그릇을 비웠다.
일기 속에 등장하는 몽둥이(?)는 이 사건 이후 약 이십 년 만에 세상 밖에 다시 등장한다.
열세 살 때는 몰랐던 이 몽둥이의 이름은 홍두깨다. 우리 엄마가 언제 사셨을지 모르는 커다란 홍두깨는, 엄마가 할머니가 되고서야 한참 만에 제 역할을 찾았다. 요리 실력이랄 게 없는 딸이 칼국수를 만든다고 나섰고, 할머니의 소중한 강아지가 떡이나 다름없는 칼국수를 먹었단 소식에 직접 등판하신 것이다.
우리 강아지, 할머니랑 칼국수 면을 만들어볼까?
강아지는 당연히 오케이다. 그리하여 친정집 교자상 위에 뚱이가 올라가 앉고, 국수 장인처럼 할머니랑 마주 앉아 반죽을 밀고 또 미는 재밌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칼국수 면이 분칠한 채 가지런히 누워 마트에서 대기하는 요즘, 진짜 손칼국수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뚱이는 자기가 면을 직접 누르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엄살이었고, 가족들은 많이 웃었다.
얼마 전, 뚱이가 태권도장에서 초록 띠를 받았다. 뚱이에게 기쁜 일이 생겨서 축하받고 싶을 때 저녁 메뉴는 당연히! 칼! 국! 수! 하도 먹어서 물린다 싶다가도, 뿌듯한 얼굴로 후루룩 면을 마셔대는 딸내미를 보고 있으면 젓가락으로 행복을 길어 올리는 기분이다. 칼국수는 그런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