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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떠나도 외롭지 않은 길, 북한산

by 정영호

혼자 떠나도 외롭지 않은 길,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따뜻한 풍경들


서울에서 하루, 나눔을 걷다

서울의 북쪽, 북한산 자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혼자 걷는 길이지만 고요한 숲, 낮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 잠시 눈 맞춘 나무들 덕분에 외롭지 않다.
오히려 그 조용한 동행 속에서 내 안의 소리를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우이경전철의 종점인 북한산우이역에 내리면 인수봉이 환한 얼굴로 맞이한다.
자전거를 타고 와서 우이경전철을 타고 오면 편했지만, 경전철은 자전거 반입이 불가하다.
그래서 수유역에 내려 자전거를 끌고 2.5km를 천천히 달렸다.
그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건, 길가의 풍경들 덕분이었다.


수유시장 골목길엔 장을 보는 손님과 웃음을 나누는 상인들이 있었다.
솔샘공원에서는 아이들 웃음이 튀었고, 황토길을 맨발로 걷는 이들과 바둑에 몰두하는 어르신들이 어울려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사람과 사람, 세대와 세대가 어우러지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것도 하나의 ‘나눔’ 아닐까. 일상의 풍경 안에 마음을 건네는 방식.


북한산 둘레길 1구간은 우이역 2번 출구에서 시작된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그늘이 짙고, 물소리가 마음을 씻는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가 나오고, 곧이어 고즈넉한 돌담 안에 자리한 천도교 중앙총부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손병희 선생의 묘소와 독립운동의 숨결이 깃든 장소다.
그는 천도교를 통해 인격과 평등을 강조했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불의에 맞섰다.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교리는 단순한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존중과 연대의 철학이었다.
그 정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하늘이 될 수 있다’고.

조금 더 걸으면 박을복 자수박물관이 나온다.
1915년생 자수 예술가 박을복 선생은 전통 자수를 현대적 미감과 결합시켜 한국 자수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의 손끝은 단지 바늘을 움직인 게 아니라 전통을 지켰고 여성의 예술적 자존심을 드러냈다.
박물관은 주말엔 운영하지 않지만 그 건물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자수처럼 조용히, 그러나 정성스럽게 살아온 그의 삶이 이 작은 공간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숲길을 따라 걷다가 이름도 모르고 들어간 사찰이 있었다.
보광사.
고요한 경내에 들어서자 발걸음이 절로 느려졌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바람 소리와 조형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무척 평화로웠다.
이 절은 1788년 금강산에서 수행한 원담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았고, 머물렀고, 또 떠났을 것이다.
그 가운데 오간 기도와 바람, 인연들은 지금도 남아 누군가의 마음을 쉬게 한다.

이 둘레길은 북한산의 거대한 품 안에서 누구나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
나는 자꾸 멈췄다. 천천히 걸었다.
계획한 목적지인 2구간까지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더 많은 사람과 장면, 나눔의 흔적을 마음에 담았다.

해 질 녘, 4·19민주묘지에 이르렀을 땐 하루의 여행이 조용히 끝을 향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수유역까지 돌아오며 생각했다.
오늘 내가 본 건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냥 길을 내어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기억을 이어주는 것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혼자 걷는 이에게도, 함께 걷는 이에게도 길은 항상 열려 있다는 걸.


�여행 정보

여행 코스 (총 5km 내외 / 도보 약 2시간 + 체험 및 관람 포함 약 3~4시간)

수유역 → 자전거 도보 이동 (2.5km)

북한산우이역 2번 출구 → 북한산 둘레길 1구간 입구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 → 천도교 중앙총부 → 박을복 자수박물관 → 보광사 → 4·19민주묘지 → 수유역

� 장소별 정보

북한산 둘레길 1구간 (소나무숲길)
주소: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산1-1
이용시간: 연중무휴, 무료
총길이 약 4.5km (우이동 ~ 북한산생태숲 입구)

천도교 중앙총부 & 손병희 묘소
주소: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 86
입장료: 무료
※ 내부 일부 건물은 평일만 개방


박을복 자수박물관
주소: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 85길 6
관람시간: 월–금 10:00~17:00 / 주말 및 공휴일 휴관
입장료: 성인 6,000원, 유아 및 학생 4,000원


보광사
주소: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길 465
입장료: 무료
연중무휴, 누구나 방문 가능


4·19 민주묘지
주소: 서울 강북구 4.19로 8길 17
입장료: 무료
운영시간: 09:00~18:00 (동절기 17:00)

� 나눔은 풍경 속에 숨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묘소를 가꾼 손길, 조용히 열린 절집, 오래된 자수를 지켜온 한 여성의 인생.
그 모든 순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을 말해줍니다.

이 길을 걷는 당신도 누군가의 하루에 조용한 나눔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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