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제 소임을 다한 해의 뒷모습이 저리 곱구나
능소화 붉게 타는 창 너머
오후 다섯 시, 병동의 저녁 식사 시간이다. 음식을 입으로 삼킬 수 없는 어르신들의 위관 영양을 마무리해 놓고 나면, 스스로 수저를 들고 음식을 삼킬 수 있는 환자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먹을 수 있는 환자들의 저녁밥이 들어온다. 혈압과 당뇨, 저작과 영양 상태에 따라 달리 차린 이름이 적힌 식판이 들어오고 분주하게 주인을 찾아가는 식판들을 확인하며 병실로 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에는 벽에 머리를 기댄 침대가 놓여 있다. 겨우 한 평 남짓한 직사각형 집에서 그들은 하루를 산다. 아침에 눈을 떠 깨어 있음을 확인하고 누군가 떠서 먹여 주는 식사를 하고 옆자리에 누운 이와 뜻 모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하루를 환하게 밝혀 주었던 해님이 떠나고 어스름 달빛에 저녁별이 떠오를 무렵 홀로 잠드는 곳도 이곳이다.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연다. 환하게 쏟아지는 빛 사이로 잔꽃들이 흔들린다. 옥상에 있던 능소화 가지가 외벽을 타고 내려와 얼비친 풍경이다. 고가도로에 차들이 밀리기 시작하는 걸 보니 퇴근 시간이 시작된 모양이다.
고가도로 너머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고층 빌딩들 사이로 능소화 가지가 주렴처럼 드리워져 바람에 흔들린다. 창 너머 방 안 풍경이 궁금해서 가지를 뻗은 것일까. 주택가 야트막한 담장에서 보았던 능소화가 도심의 빌딩 숲 하늘에 닿아 여름 하늘을 주황빛 꽃으로 수놓았다. 사각의 창틀에 한 폭의 그림을 걸어 놓은 것 같은 바깥 풍경이 이색적이나 이곳과 꽤 잘 어울린다.
여름 저녁 시간은 더디 온다. 한낮의 열기를 풀어 놓고 서산으로 기울던 태양도 산 중턱에 비스듬히 앉아 쉬어 가는 해거름이다. 해는 남은 열기를 모두 토해 백양산을 붉게 물들인다. 하루의 따사로운 기억을 모아 빚어낸 오래된 부챗살 같은 저녁 햇발은 거친 마룻바닥으로 살며시 내려앉는다.
날마다 보는 태양의 옆모습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나는 오늘 또 어떤 하루를 살았는가.’ 스스로 묻는다. 마음만 앞서 유난을 떨어 불편하게 하진 않았는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여 보고도 못 본 체 지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병실에는 네 명의 할머니가 서로에게 기대며 생활한다. 오가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듣노라면 듣는 대상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건네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또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갈 뿐이다. 간혹 상황에 맞는 응수를 건네기도 하나 그건 우연에 가깝다. 그러다가 서로 마주 보고 웃기도 하니 얼핏 보면 보통 할머니들의 수다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수시로 병실에 들러 대화에 끼어들기도 하고 따라 웃으며 하루를 보내는데 그들과 함께 있으면 미소가 절로 나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 역시 저 나이에 이르면 그들과 크게 다른 모습이지 않을 거라는 동병상련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한창 식사하고 있을 때 옆자리에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나는 위치는 ‘여보세요 할머니’ 자리다. 식사 수발을 하는 요양보호사 둘이 할머니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요양보호사가 선창하고 할머니가 뒤를 잇고 후렴구는 같이 불렀다. 몇 숟갈 뜨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할머니께 밥 한술이라도 더 드시라고 어르고 달래며 장단을 맞추고 있다. 귀엽고 얌전한 외모와 달리 노랫소리는 구슬프고 구성지다.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되는 상황이다. ‘여보세요 할머니’는 몇 술 뜨고 배부르다며 그만 먹겠다고 하거나 한술 뜨고 꾸벅꾸벅 졸 때도 있어 식사를 챙기는 분들이 애를 먹는다.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이나 잘 먹고 잘 자고 잘 내보내면 그게 제일 큰 복이다. 요양병원에서는 음식을 잘 먹는데 아픈 사람은 거의 없다. 갑자기 식사량이 줄거나 식욕이 없으면 기어코 탈이 난다. 반대로 아프다가도 이전 식욕을 회복할 때는 병세 또한 호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보세요 할머니’라 부르게 된 건 할머니가 오자마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체온을 잴 때 성함을 묻고 절차를 거쳐 체온계를 귀에 넣었더니 갑자기 여보세요? 하더란다. 매번 잴 때마다 여보세요? 하니 직원들 사이에서 ‘여보세요 할머니’라 불리게 되었다. 콩트 같은 상황에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멋쩍게 따라 웃을 때면 웃음의 결 따라 생긴 깊은 주름이 한 송이 꽃처럼 무늬를 그린다.
어린 제비처럼 입을 벌려 받아먹는 할머니를 보며 나도 노래를 따라 불렀다. 병실에 노래판이 벌어졌다. 오늘따라 흥겨워서 그런지 들고 있던 숟가락도 춤을 춘다. 기분이 좋아진 할머니들도 음정 박자 틀려도 노래를 이어 부르며 식사를 끝냈다. 말끔히 비워진 식판을 밖으로 내놓고 자리를 정리한다. ‘여보세요 할머니’ 덕분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기분이 좋아진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웃을 수 있지 싶다.
처음 근무를 시작했을 때 중환자들이 많은 병동이라 긴장되었다. 일반 환자들보다 더 많은 관심과 손길이 필요하고 언제든 응급 상황이 터질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거나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분들을 보는 일은 마음에 무게를 더했다.
대화가 거의 없는 중환자실에서 벗어나 비교적 건강한 환자들이 있는 병실에 갈 때면 수시로 말을 걸게 된다. 별 의미 없는 말일지라도 그 순간이나마 귀 기울여 들어 주고 싶은 까닭이다. 할머니들이 있는 병실에 가서는 시시한 농담의 말로 분위기를 띄우기도 한다.
소란하던 식사 시간이 끝났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밤이 찾아오고 어르신들도 하나둘 잠자리에 든다. 미처 챙기지 못한 건 없는지 방 안을 둘러본다. 침상 난간을 올리고 이불을 덮어 드리고 한 분씩 얼굴을 들여다보며 잠자리를 살핀다. 미소 띤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거나 잠을 청하며 자리를 뒤척이거나, 모두 행복한 꿈을 꾸며 편안히 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삶의 어느 한 지점에서 잠시 쉬어 가는 곳, 매일 매 순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를 울컥하게 한다. 감출 것 없고 꾸밈없는 이곳의 이야기는 그래서 너무나 따뜻하고 감동적이다. 오늘 또 하나의 이야기를 가슴에 담는다.
내 나이 오십 무렵 생채기를 치유할 묘약으로 수필을 선택했다. 울고 웃으며 글에 몰입하는 동안 답답했던 마음이 환하게 풀렸다. 개운해진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이들의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누군가를 보듬어 줄 마음도 생겨났다.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고 그들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옮긴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신의 한 수가 있다면 뒤늦은 나이에 글을 만나고 또 이분들을 만난 것이다.
한낮은 뜨거워도 밤 기온은 아직 차다. 창문을 닫으러 창가로 간다. 활동이 적은 환자들에게 방 안의 적정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일은 환자의 건강과 직결되기에 세심히 살펴야 한다. 해는 서산으로 훌쩍 넘어가고 저녁놀만 하늘가를 붉게 물들인다. 종일 제 소임을 다한 해의 뒷모습이 저리 곱구나, 주황빛이 서서히 잦아드는 풍경에 한동안 눈길이 머문다. 빛이 떠난 거리에는 하나둘 가로등이 어둠을 밝힌다. 창 너머 붉게 타는 능소화를 보며 살며시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