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이들은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렸다
무가 도착했다. 퇴직한 오빠가 고향에서 농사지은 거다. 오빠가 보내는 무는 모양이 고르지 않아도 들큼한 단맛이 일품이다. 생채를 만들고 국을 끓여도 몇 개 남았다. 마침 깍두기가 떨어져 남은 무로는 김치를 담기로 한다.
무를 껍질째 씻어 물기를 뺀 후 깍둑썰기 한다. 소금이 배도록 천일염을 뿌려 몇 번 섞다가 삼십 분 정도 둔다. 절이는 동안 양파, 새우젓, 찬밥, 마늘, 생강을 물 조금 넣어 갈아 두고 쪽파는 썰어 따로 둔다. 양푼에 물이 흥건해지면 무를 건져 찬물을 부어 짠맛을 뺀다.
깍두기는 예부터 우리의 식탁에 빠지지 않는 대표 음식이다. 재료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고 담기도 손쉬운 전통 음식으로 문화재로도 지정되었다. 깍두기는 오래전에 젓무, 홍저紅葅, 송송이로 불렸다. 정조 때 공주가 처음으로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는데 당시의 이름은 각독기이다. 그 후 널리 민간에 퍼져 우리의 밥상에 빠지지 않는 밑반찬이 되었다.
양념에 고춧가루를 섞은 후 무를 넣고 마지막에 쪽파를 넣어 버무린다. 맛이 잘 어우러지도록 섞고 치댄다. 깍두기는 사철 어느 때나 밥상에 오르는 단골 반찬이다. 겨울철 설렁탕 한 술에 깍두기를 얹어 한입 넣으면 입안 가득 시큼하고 구수한 맛이 한데 어우러져 깊은 맛을 더한다. 라면에 곁들인 깍두기는 또 어떤가. 반찬이 없는 여름에도 깍두기만 있으면 찬물에 밥 말아서 눈 깜짝할 새에 한 그릇 뚝딱이다.
우리에겐 독특한 놀이 문화가 있다. 편을 갈라서 하는 놀이에서 숫자가 맞지 않거나 무리보다 현저히 실력이 떨어지는 친구가 있을 때 힘이 센 친구에 얹혀 가거나 누가 봐도 세력이 약한 편에 덤으로 주는 사람을 깍두기라 불렀다. 또래보다 체구가 작아 게임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아이,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놀이 문화를 모르는 아이, 여자들의 놀이에 끼어 규칙을 모르는 남자아이들이 놀이에 제대로 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장난감이 없었던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다. 집 옆에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다. 그곳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다. 언니는 친구들과 놀 때면 나를 데리고 나갔다. 언니는 나를 돌봐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나를 데리고 다녔고 나는 언니들 틈에 끼어 함께 놀곤 했다. 그때 내 점수는 매기지 않는 조건이었고 동생을 돌봐야 하는 언니와 나를 위한 언니들의 배려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친구들과 공터에 모여 놀았다. 나는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었고 달리기는 자신 있었다. 다방구, 숨바꼭질, 오징어 게임에는 서로 데려갔다. 나무를 꺾어서 하는 자치기나 땅따먹기도 신체 조건이 우월한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는 놀이여서 제 몫을 해냈다. 하지만 정교한 손기술이 필요한 공기놀이나 다리로 고무줄을 휘감아 허리까지 다리를 뻗고 뒤로 돌아 나오는 서커스 같은 고무줄놀이는 젬병이었다. 친구들의 눈치도 있었지만 누가 뭐라 하기 전에 스스로 주눅이 들어 뒤로 빠졌다.
손은 작아도 신비의 경지에 가까울 정도로 손놀림이 현란한 언니가 있었다. 한 개의 공깃돌을 던져 내려오는 동안 나머지를 움켜쥐고 던졌던 돌을 받아 손등에 올려서 다시 던져서 잡았다. 비법을 배우려고 매의 눈으로 지켜봐도 손을 오므렸다 폈다 공깃돌을 정리해서 던져 움켜쥘 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서 알 수 없었다. 공기놀이에서 나는 늘 잘하는 친구에 업혀 가거나 못하는 팀에 덤으로 얹어 힘의 균형을 맞추었다.
여러 사람이 함부로 떠들거나 덤벼 뒤죽박죽된 난장판을 일컬어 깍두기판이라 부른다. 또 힘깨나 쓰고 무리 지어 다니는 이들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아마도 머리를 단정히 자른 모양에서 유래한 듯싶다. 밥상 위의 단골 메뉴 깍두기는 생활 속 여기저기 갖다 붙일 만큼 친근하고 재미있는 말이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패닉 상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였다. 사망 환자가 속출하고 의료 인력이 부족한 현실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쉬는 시간도 없이 일하다 쓰러지는 의료인들을 보며 중대사고수습본부에 코로나19 파견인력으로 지원했다. 부산시에서 운영하고 요양병원 감염 병동으로 파견되어 업무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며칠 후 부산의 요양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거친 후 업무에 들어갔다. 바이러스에 직접 노출되는 데 대한 두려움보다 새로운 업무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더 컸다. 전국 각지에서 의료 인력이 모여들었다. 입구에서부터 병실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24시간 환자와 의료진의 일거수일투족이 녹화되었다. 일반 병동과 격리된 병동이다 보니 출입이 금지되었고 파견인력들도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어진 방호복을 입고 N95 마스크를 쓰고 멸균 장갑을 두 겹 낀 후 눈과 얼굴을 보호하는 페이스 실드를 쓰면 준비 완료이다. 옷을 입을 때부터 콧잔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오염존에 들어가면 두 시간 안에 업무를 처리하고 나와야 하니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불시에 일어나는 위급 상황에서는 역할 구분 없이 뛰어든다. 방호복을 벗고 오염 구역을 벗어날 때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환자와 의료진 모두 처음 겪는 현장에서 까다로운 보안시스템 아래 수행하는 업무의 피로도는 극심했다. 병동의 모든 일을 카메라로 녹화하여 보존하니 매 순간 행동이 조심스럽고 긴장되었다. 파견 지역과 근무조건에 맞는 일자리를 어렵게 구해도 몇 시간 못 버티고 백기를 들거나 하루 근무하고 포기하거나, 좀 더 편한 자리를 찾아 떠나는 이들로 인해 늘 의료진은 부족했다. 남은 이들은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렸다.
코로나19가 정점을 찍을 때는 시시각각 늘어나는 환자로 침상이 부족했다. 바뀌는 방역지침에 따라 새로운 업무는 늘어나 모두 지칠 대로 지쳤다. 첫 출발지에서 버텨 내리라던 첫 마음이 흔들렸다. 그때마다 남은 동료들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 역시 그곳을 떠나고 말았을 거다. 우여곡절 끝에 백신이 개발되어 감염 병동이 문을 닫는 마지막까지 나는 그곳을 지켰다.
파견 업무가 끝나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만났다. 근무한 시기는 조금씩 달라도 동고동락했던 이들이라 반가웠다. 누군가 나에게 “깍두기, 아직 살아 있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때 신입인 나와 결혼으로 경력 단절되었던 이가 있었는데 매사에 서툴렀던 그녀와 나는 깍두기였단다.
그 후 파견 경험이 인연이 되어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무엇보다 치열하게 한 생을 살아 낸 분들의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사명감으로 가슴이 뿌듯해지는 일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남은 생을 이들과 함께 보내리라 다짐하며 매일 그들을 만난다.
일하다가 문득 깍두기 시절을 추억한다. 바이러스를 퇴치할 백신이 하루빨리 개발되기를 기다리며 감염자들을 정성으로 보살폈던 동료들 얼굴도 떠오른다. 오십을 훌쩍 넘긴 초보 동료가 업무를 제대로 배워 정착할 수 있도록 남모르게 배려하고 챙겨 주던 이들이다. 생사가 엇갈리는 코로나19의 최전방 병동에서의 동료애가 있었기에 나는 지금 한 사람의 몫을 해내고 있다.
곱게 버무려져 빨갛게 물이 든 깍두기를 투명한 용기에 담는다. 어슷비슷 서로에 기대어 담긴 모습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바이러스와 맞섰던 그때의 나를 보는 것 같다. 김치가 잘 익기를 기다리며 베란다에 내어놓고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한다. 옷을 갈아입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인사를 건넨다.
“깍두기, 살아 있네. 살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