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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속 계엄(戒嚴)의 데자뷔

敢히, 嚴히

by 정한

출처: 영화 대호의 한 장면




문자가 그리고 있는 계엄은 어떤 모습일까?

계엄은 戒(경계할 계)와 嚴(엄할 엄)이 합해진 단어이다. 문자적 의미로만 보면 '엄격하게 경계함'을 뜻한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옛 문자가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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戒(경계할 계)는 병사가 두 손으로 큰 창(戈)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 병사가 경계하고 있는 곳은 고대에 왕들의 마지막 피난처인 요새이다. 그 요새의 험준함을 뜻하는 글자가 嚴(엄할 엄)이다.

嚴(엄할 엄)은 산의(厂) 정상부위에 바위들이 쌓여있는(品) 모습을 그린 嵓(바위 암)과 그 아래 敢(감히 감)을 더한 형태이다. 여기서 敢(감)은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 것일까?

敢(감)의 갑골문은 뜰채 모양의 그물(卓)로 멧돼지를 사냥하는 모습이다. 이후 금문에서부터 자형이 심하게 왜곡되어 그물의 모습이 甘(감), 古(고)등으로 변형되었고, 그물을 잡고 있는 손(又)이 추가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나중에 나온 소전에서는 다시 원래의미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소전은 왼쪽부터 彐(돼지머리 계),(몸 육) 그리고 그 오른편은,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殳창 수)으로, 병사 혹은 사냥꾼이 손에 무기를 들고 멧돼지를 공격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저돌(猪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멧돼지는 화가 나면 물불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멧돼지를 그물로 포획하는 하는 모습에서 敢(감)은 '감히~하다. 용맹하다, 결단성이 있다'등의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 용감하기 짝이 없음을 뜻하는 용감무쌍(勇敢無雙)에 그 뜻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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敢(감)의 원래의미를 헤아려보면, 嚴(엄할 엄)은 위험을 무릅쓰고 멧돼지 등의 맹수를 사냥하는 장소로서 험한 바위산()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기상이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숲이 삼엄한 질서가 있다는 의미에서 위엄(威嚴), 장엄(莊嚴), 엄숙(嚴肅), 존엄(尊嚴), 엄격(嚴格), 삼엄(森嚴) 등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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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嚴(엄할 엄)이 의미하는 험준한 바위산은 비유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뜻하기도 한다. 이 경우 嚴(엄)은 그물로 멧돼지를 포획하듯이(敢) 용감한 병사들이 요새를(巖) 포위 공격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어원이 히브리어 '추르'이다. 추르는 산 위에 있는 바위(반석)를 뜻하는 말인데, 그 강함에서 비유적으로 적이 함부로 공략할 수 없는 강한 성이나 절벽 위에 세운 요새를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포위(공격)하다, 둘러싸다'를 뜻하는 동음이의어 추르에서 유래되었다.


추르 = 바위(산과 병행함), 요새

추르 = 포위(공격)하다, 둘러싸다


그 용례를 보면, 추르가 포위 공격을 뜻할 때는 고대 공성전에서 병사들이 적의 요새를 포위 공격하거나 경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성을 포위하여 물을 차단하고 주민이 도피하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경계했다(삼하 12:27). 또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성벽까지 닿는 토루를 축조하여 성을 넘거나 공성 망치를 이용해서 성벽을 깨뜨렸다(삼하 20:15, 겔 26:8). 이때 성안의 주민들은 칼의 공포와 굶주림 양면의 위협에 맞닥뜨렸다. 그래서 군사나 백성들 중에서 일부는 도망하여 적에게 항복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렘 21:9). 또한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식품의 값이 뛰어 성안의 긴장이 고조되었다(왕하 6:25). (바이블렉스 원어 사전 참조)


이러한 사정들이 문자에 반영되어 嚴(엄)은 '엄격하다, 혹독하다, 빈틈없다, 급하다, 절박하다, 계엄(戒嚴), 경비(警備)'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계엄(戒嚴)이 보여주는 그림은, 전쟁이나 비상상황에서, 군대가 병사 또는 백성들을 엄격한 규율로 다스리며 적을 경계하는 모습(戒)이다. 이를 지금 계엄의 의미에 적용하면, 군사적 필요나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행정권과 사법권의 전부 또는 일부를 군이 맡아 엄격한 규율로 다스리며 이를 어기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경계하는 것을 말한다.


이번 12.3 계엄령을 보면, 모든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하며,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이를 어길 시는 처단한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만약 비상계엄이 성공했다면 그 모습은 嚴(엄할 엄)이 보여주는 모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계엄군의 위세는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오를 수 없는 험준한 산과 같았을 것이고, 그 위세로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포획하였을 것이고, 국민들은 총칼의 두려움과 맞서며 자유를 억압당하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짧게나마? 우리는 밤잠을 설치며 그 축소판을 지켜보았다. 계엄령이 선포되던 날, 국회를 지키려는 시민들과 이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의 공성전을 보았고, 비상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두 편으로 갈라선 국민들의 아스팔트 위의 공성전을 보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윤석렬 대통령은 법원에서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요새화된 관저에서 경호처를 방패 삼아 삼엄한 계엄을 행했다. 그야말로 한자 속 계엄의 데자뷔였다.


결국 공수처와 경찰이, 수성(守城)을 포기한 경호처의 계엄을 넘어 체포영장을 집행함으로써 드디어 공성전은 끝이 났다. 이제 심판의 시간이 도래했다.


敢히 말한다. 용산에서 내려와 평화로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 멧돼지 떼가 더 이상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빠짐없이 포획하여 嚴히 다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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