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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이기는 마법한자 경(敬)

by 정한

<<고려사>> 열전에 <우탁 설화>가 나온다.

우탁(禹倬)은 고려 말기의(1263~1342) 유학자이다. 우탁은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통간하자, 흰옷을 입고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극간(極諫:목숨을 걸고 간언함)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평소 유학에서 금지하는 미신 숭배와 민간 신앙을 타파하는 데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우탁이 영해 고을의 사록으로 부임했을 때였다. 당시 주민들은 팔령신(八鈴神)이라 부르는 요괴를 극진히 섬겼다. 팔령신은 종소리를 내는 여덟 요괴로, 팔령정(八鈴亭)이라 이르는 신사(神祠)에 출몰하는 요괴를 말한다. 이 요괴는 방울 소리만 낼뿐 형체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 요괴가 어떤 집의 지붕 위에 나타나 방울소리를 울리면 그 집은 어김없이 흉사를 당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성대한 제사와 굿으로 요괴를 달랬다. 그 폐해가 심해 민심이 흉흉해지자, 우탁은 사당을 폐하고 방울을(鈴) 부수어서 바다에 빠뜨렸다고 전한다.


다른 구전도 흥미롭다. 우탁은 <주역>을 깊이 공부하여 도술을 지니게 되었는데, 하루는 개구리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자 계속 시끄럽게 굴면 멸종시키겠다는 협박의 글을 적어 보냈다. 그랬더니 개구리들이 동헌에 모여들어 살려 달라며 애원했다고 한다. 또 한 마을에서는, 백호(白虎)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자, 그 피해를 막기 위해 처녀를 인신제물로 바치고 있었는데, 우탁이 '경(敬)'자를 써 붙여 백호를 물리쳤다고 전한다.


우탁설화도 흥미롭지만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敬경'자이다. 호랑이도 도망가게 만드는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敬(공경할 경)은 <설문해자>에서 그 뜻을 '엄숙함(肅)'이라 하였으며, 攴(복)과 苟(구)를 따르는 회의자로 설명했다. 허신의 말처럼 敬(경)의 원형은 苟(진실로 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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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진실로 구)의 갑골문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양(㔾)인데, 머리 부위가 卝(쌍 상투 관)의 모습이다. 그것은 고대 제사장이나 왕이 대관식 등의 의식을 행하는 모습으로, 머리 위에 큰 장식(양뿔이 아니다)을 얹고 다소곳이 꿇어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로부터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란 뜻이 나왔고, 위엄 있고 거룩한 모습에서 '진실로'란 뜻이 나왔다.

*허신은 <설문>에서 苟(구)를 '풀(艸)'의 이름이라고 하였지만 이는 소전에 근거한 것으로 잘못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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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뒷받침하는 어원이 있다. 히브리어 '하다르'가 그것이다.

하다르는 '솟아오르다, 꾸미다, 공경하다'를 뜻한다. 그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리를 치장하고 예복을 갖춰 입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은 하다르를 사용해서 젊은이들은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나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다르)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한편 '하다르'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편파적으로 두둔하는 것'을 뜻한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다르) 하지 말지니라"(출 23:3)


'하다르'와 마찬가지로, 苟(구)가 긍정을 뜻할 때는 위엄 있고 거룩한 모습(敬)을 뜻하지만, 부정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苟(구)와 대비되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로부터 '苟구'는 '겨우, 낮은, 구차하다'등의 뜻이 나왔다.


한편 苟(진실로 구)와 敬(공경할 경)은 영어 단어 리스팩(respect)과 괘를 같이 한다.

리스팩은 타인에 대한 '존경敬' 또는 '배려'를 뜻한다. 이 단어는 다시(re), 보다(spect)를 뜻하는 라틴어

리스팩터스(respectus)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 개념은 타인에 대한 존경 또는 배려하는 마음에서 다시 한번 더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말이나 태도, 분위기 따위가 위엄(敬)이 있어 다시(re) 한 번 쳐다보면(spect) 그것이 respect(敬존경하다)이다.


그런데 'respect the person'은 '(지위 등에 따라) 차별 대우하다, 두둔하다'를 뜻한다. 즉 '하다르'나 '苟(진실로 구)'의 부정적인 용례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지위나 겉모습을 보고 두둔하는 것을 뜻한다.


茍, 敬.jpg

한편 苟(진실로 구)에 口(입 구)를 더하면, 茍(빠를 극/삼갈 극)이 된다. 여기서 苟(구)는 존경(敬)의 의미가 아니라 부정(경멸)의 의미로 쓰였다. 茍(빠를 극)에서 苟(구)는 갑골문 시대 때, 상족(商)의 가장 강한 적이었던 강족(姜)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멸의 대상이었던 강족을 사로잡아 '敬경'을 강요하며 다그치는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苟(진실로 구)의 본래 의미는 아니다. 문자를 새로 만드는 대신 기존의 글자를 차용하고, 살을 붙이거나 조금 변형시켜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조자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여하튼 苟(진실로 구)에 口(입 구)를 더한 茍(빠를 극/삼갈 극)은, 사로잡아 온 포로나 죄인을 큰 소리로 다그치는 모습이다. 후에 攴칠 복을 더한 것이 지금의 敬(공경할 경)이다.


결국 敬(공경할 경)의 금문은,


포로로 잡혀온 적이나 죄인을 교화 또는 굴복시키기 위해서 빠른 말로 다그치며(茍빠를 극) 매질하는(攴) 모습이다. 이리하여 敬(경)은 그 원래 의미인,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는 경건함(苟) 뿐만 아니라 교육이나 훈계(攴)에 의한 근신(말이나 행동을 조심함)의 의미까지 담았다.


이러한 경건(敬)과 근신(敬)의 힘을 빌려 우탁은 백호마저 무릎 꿇게 하였다. 일찍이 그 힘을 발견한 것이 성리학이다. 성리학에서 敬(경)은, 그 문자적 의미를 넘어 '욕망을 억제하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主一無適)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는 정신'을 가리키는 철학적인 용어로 사용했다.





그 외 敬이 들어간 글자


擎(들 경) - 敬 + 手

고대의 예법(敬)인 읍을 의미한다. 읍은 두 손을 맞대어 손(手)을 들어 올렸다가 고개를 숙이는 동작과 함께 손을 내리는 인사예법을 말한다.


警(경계할 경) - 敬 + 言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시키는(敬) 말(言)을 뜻한다. 즉 훈계, 교훈 따위의 일깨우는 말의 의미에서 '경계하다, 깨우치다'란 뜻이 나왔다.


驚(놀랄 경) - 敬 + 馬

말은 겁이 많아서 잘 놀란다. 그래서 말(馬)에게 다가갈 때는 놀라지 않도록 조심해야(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