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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과 콩나무 숙(叔)

by 정한

놀랍게도 그 콩은 하룻밤 사이에 높이 자라 큰 나무가 되어 있었다.

동화 <잭과 콩나무>에 등장하는 '넝쿨콩'을 그린 글자가 叔(아제비 숙)이다.

叔(숙)의 갑골문은, 나무를 타고 오르는 넝쿨콩을 그렸다. 그러므로 叔(숙)의 본의는 '콩'이다.


이후 금문에서는, 손으로 콩을 터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지금 자형(叔)에서, 왼쪽 윗부분 上(윗 상)은 콩나무의 변형이고, 그 아래 小(작을 소)는 땅바닥에 떨어진 콩알을, 오른편의 又(또 우)는 콩을 터는 손의 상형이다. 이로부터 '떨다, 줍다, 타작하다'는 뜻이 나왔다. 이렇게 의미가 확대되자 그 원래의미는 艹(풀 초)를 더하여 菽(콩 숙)으로 분화하였다.


그렇다면 '叔'이 '작은 아버지'를 가리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 꼬투리 안에 줄지어 들어있는 콩알들의 모습이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들의 서열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伯父(백부)는 형제 중에 맏이를(白), 숙부(叔父)는 아버지의 남동생을 가리킨다.


한편 叔(아제비 숙)에 目(눈 목)을 더한 督(살필 독)은, 콩의 수확 시기를 가늠하기 위해서 꼬투리를 살피는 것을 말한다. 콩을 거둘 때는 그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너무 늦을 경우 수확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콩꼬투리가 벌어지며 알맹이가 소실되기 때문이다.


콩대를 꺾는 적기는 잎이 누렇게 변해 떨어지고, 그 꼬투리가 변색되어 고유의 색을 띨 때이다. 이때 콩꼬투리를 흔들어 소리가 나면 씨앗이 다 여문 것으로 판단하는데 督(독)이 바로 그 모습을 나타낸 글자이다. 꼬투리의 색을 눈(目)으로 살피며 손으로 흔들어 보는 모습(叔)을 표현했다. 이로부터 '자세히 살피다, 감독하다'라는 뜻이 나왔다. 이때 씨앗이 다 여물었으면 꼬투리가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 거두어야 한다. 따라서 주인 또는 감독이 일꾼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며 수확을 서두르는 모습이 독촉(督促)이다.


俶(비롯할 수 / 기재 있을 척)은 콩을 털 때, 도리깨질을 맨 먼저 시작하는 상도리깨꾼을 뜻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콩털기를 할 때는, 마당에 진흙을 평평하게 편 다음 밟아서 단단하게 다진다. 踧(평평할 척)이 그 모습이다. 마당이 준비되면 멍석을 깔고 그 위에 콩을 일정한 두께의 원형으로 펴 놓는다. 그런 다음 작대기나 도리깨로 쳐서 탈곡하는데, 도리깨질은 혼자서도 하지만 매우 고된 노동이므로 일감이 많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 형식으로 함께 모여서 일을 한다.


도리깨질을 할 때는, 고된 노동의 고통을 덜고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도리깨질소리(타작소리라고도 한다)에 맞추어 행한다. 이때 상도리깨군이 선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종도리깨꾼 전체가 후렴을 받는다.

俶(비롯할 숙)은 상도리깨꾼이(人) 선창 하며 콩털기를(叔)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한편 깔아놓은 콩을 다 치고나면 도리깨를 내려놓고 콩을 뒤집은 다음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노련한 도리깨꾼은 도리깨질을 멈추지 않고, 당겨치기, 밀어치기, 옆치기 등의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여 곡식을 펼치거나 모으며 뒤집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노련한 도리깨질의 기술에서,

俶(숙)은 '비롯하다'는 뜻 외에 '기이한 재주가 있다, 뛰어나다, 시원시원하다'등의 뜻도 가지게 되었다.


도리깨질을 하여 한벌치기가 끝나면 갈퀴로 콩대와 콩깍지를 추려 내고 다시 재벌치기를 한다. 이렇게 서너 벌 정도 행하면 껍질이 말끔하게 제거된다. 도리깨질이 끝나면 콩은 거두어 키질하여 남은 먼지나 검불을 깨끗하게 떼어 낸다. 이로부터 叔(아제비 숙)은 '깨끗하다, 부정한 것을 떨어내다(拂), 멸하다, 없다(弗)'라는 뜻도 가지게 되었다.


淑(맑을 숙)은 '물(水)에 어떠한 부정함도 없다(叔)'라는 뜻으로, 정화수를 의미한다. 정화수는 이른 새벽에 길어 부정을 타지 않은 우물물을 말한다. 정화수는 예부터 기도할 때, 신에게 바치던 물로 '정안수'라고도 한다. 그 이름이 말하듯이 물의 성분적인 깨끗함보다는 신앙적인 성스러움과 정결함을 더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淑(숙)은 '착하다, 어질다, 아름답다, 길하다, 상서롭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조숙녀(窈窕淑女), 정숙(貞淑)에 그 뜻이 담겼다.


마찬가지로 寂(고요할 적)은 '집(宀)에 부정함이 없다(叔)'는 뜻으로, 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사당을 뜻한다.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사당의 모습에서 '고요하다, 적막하다'등의 뜻이 나왔다.


寂(고요할 적) 자를 보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이 그린 파적도(破寂圖)이다.


햇살이 따뜻한 봄날, 집 마당에는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거닐고 한가로이 모이를 쪼고 있다.

그런데 홀연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병아리 한 마리를 물고 달아난다.

어미닭이, 놀라서 사방으로 달아나는 새끼들을 뒤로한 채

날개를 퍼득이며 고양이 뒤를 쫓는다.

툇마루에 앉아있던 영감은 급한 마음에 곰방대를 휘두르다가 중심을 잃고 엎어지는데,

그보다 앞서 머리에 쓰고 있던 탕건이 땅바닥에 나뒹굴고. 영감 뒤에는 부인이 맨발로

뛰어내려오고 있다.


파적도(破寂圖)란 이름 그대로, 고요함(寂)을 깨뜨리는(破) 한바탕 소동을

마치 눈앞에서 보듯이 생동감 있고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한편 불교에서는 寂(고요할 적)을 '열반'과 동일시한다. 열반은 산스크리트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번뇌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뜻한다. 寂(고요할 적)의 원뜻에 비추어보면, 열반은 인적없는 산사의 적막함과(寂) 같은 내면의 고요함이 실현된 완전한 평안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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