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청소를 대하는 자세에 따라 사람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정리정돈파'와 '살균파'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웃으며 넘겼지만, 곱씹을수록 이 말이 그럴듯하게 느껴져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말을 진리인 것처럼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살균파'에 속한다. 화장실에 물 때나 곰팡이가 낀 것을 못 본 척 넘기지 못하고, 먼지가 쌓인 곳을 보면 물티슈를 뽑아 덤빈다. 기름때가 묻은 유리의 표면도 그냥 넘기질 못하고 빛의 방향을 확인하며 흔적 없이 닦는 것을 즐기니, 나는 살균파가 맞다.
그렇다고 정리정돈 실력이 아주 형편없는 것은 아니지만(그렇다고 믿고 싶다),워낙 여기저기 마음을 잘 빼앗기고 얕고 가늘게 관심을 두는 분야가 많아 주변에 물건이 늘 많은 것은 내겐 숨기고픈 비밀이다.'미니멀리즘'은 내 평생의 동경이며 동시에 웬만해선 가 닿을 수 없는 짝사랑 같은 라이프스타일이다.그래도 나름 철이 든(?)요즈음은 무분별한 소비를 자제하고 환경을 생각하며 지속가능한 소비를 하려 나름 노력하지만, 왕초보 수준에 가깝고 여기저기 마음이 팔랑거리긴 매한가지다.그러므로 내가 이번 생에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는 영 쉽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이러한 성향은 교실에서도 숨길 수가 없다. 신기하게도 교사의 성향은 그 교사가 생활하는 교실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교사는 책상 서랍이 텅 빈 교사이다. 나는 일 년에 한 번이나 쓸까 말까 한 교구도, 아이들의 수업에 좀 보탬이 될까 해서 구입한 이런저런 책들도 보따리장수처럼 이고 지며 매년 한해살이를 반복한다. 교실의 책꽂이는 물론 서랍 속의 공간도 내겐 턱없이 부족하다.
같은 직업을 가진 친구들과 농담 반 진담 반 하는 말 중엔, 책상 위가 엉망진창인 게 부끄러워 아파도 꾹 참고 출근한단 말이 있다. 가끔 몸이 좋지 않은 날 저녁이면 퇴근하며 내 책상 위가 어땠던가를 돌아보게 되니, 이는 사실 농담이 아닌 진담에 가깝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이런 내가 매우 부끄럽다.)
맥시멀리스트 교사의 변명
물론 그렇다고 하여 우리 교실이 돼지우리나 헛간 같은 곳은 아니다(!). 오히려 사정을 모르는 동료들은 우리 교실에 올 때면 교실이 너무 잘 정돈되어 있다고 놀라기도 한다.(서랍장 속 사정을 봐야 할 텐데...ㅎㅎ)
교실은 나도 물론이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이 생활하는 장소이기에 나는 아이들이 하교한 후에는 매일 같이 바닥을 쓸고 닦고, 학교의 고질적인 문제인 먼지 덩어리(정말 '덩어리'다.)와 싸우며 고군분투한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 교실의 문제는 역시 '너무도 많은 물건'이다. 하지만 그 모든 물건들에도 나름의 쓸모가 있음을. 우리 교실 속 물건들의 쓸모에 대해 맥시멀리스트 교사로서 일종의 변명을 해 본다.
교실 앞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각종 책과 몇 개의 학습 교구 바구니로 채워진 벽면 책장이다. 책 읽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것은 나의 특징이기도 하여 우리 반 학급 문고는 내가 야금야금 사 모은 책들로 가득하다. 거기에 아이들의 책 읽기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올해 사비로 장만한 미니 북카트와, 도서실에서 주기적으로 바꿔오는 40-50여 권의 책까지 더해져 우리 교실은 거의 '책 숲'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책이 많다.
초등학교에서 꼭 마쳐야 하는 과업을 딱 하나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최대한 책 많이 읽기'라고 답할 것이다.내가 개인적으로 소장한 책들은 대부분 수업 시간에 중요한 수업 자료로써 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 해에 걸쳐 사 모은 책들이 가득한 책장은 부끄럽지는 않지만 뭐랄까, 아주 가끔은 '차라리 이곳이 도서실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 있다.
우리 교실은 우선 책이 많고, 거기에 더해 이런저런 물건도 많다. 특히 초등학생을 가르치게 되며 한동안 나의 관심사는 아이들의 흥미를 끌 법한 수업 도구 및 교구들을 수집하고 모으는 데 있었다. 다이소에서 우연히 만난 귀여운 인형 모양의 '안마봉'은 내 손에서 몇 년째 '지시봉'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아이들에게 인기를 끄는 중이다. 이처럼 시중에 나와있는 제품을 본래의 용도가 아닌, 교실 안에서의 새로운 용도를 가진 물건으로 탈바꿈할 때면 왠지 모를 희열을 느끼기까지 하니 어쩌면 나는 뼛속까지 교사가 되어버린지도 모르겠다.
절대 내 손으론 버릴 수 없는 것들
하지만 내가 '맥시멀리스트'가 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사실 나는 우리 교실의 가장 큰 문제점을 이미 알고 있다.내가 부족한 수납 공간에 늘 허덕이는 이유는 바로 '내 손으론 버릴 수 없는 아이들의 작품'이다. '작품'은 아이들이 완성한 프로젝트 결과물일 때도 있고 아이들이 쓴 글일 때도 있다. 때론 미술 시간에 배운 종이 접기를 적용해 만들어 온 무언가, 클레이로 열심히 반죽한 그 무언가(날 닮았다는 동물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모양일 때가 많지만 원작자의 설명 없이는 정체를 알기 어렵다.), 심지어 별 것 아닌 편지나 쪽지 같은 것들이기도 하다.
정작 그 작품의 원작자들은 너무도 쿨하게 '저는 필요 없으니까 선생님 드릴게요.' 혹은 '선생님, 선물이에요!' 하며 선심을 베풀지만, 나는 그 작은 호의에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지곤 한다. 그러니 이제껏 내가 모아 온, 우리 교실을 좁게 만드는 근원인 '아이들의 작품'은 내겐 세상 무엇보다 뚜렷한 성장의 증거물이며 동시에 후배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부여해 줄 수 있는 '명작'과 다름없다.너무도 작지만 세상 크고 소중한 진심이 담겨, 지친 나를 언제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성물'과 진배없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마다 이런 '작품'은 늘기만 할 뿐. 정리의 제1원칙은 'One thing In, Other thing Out'에 있다던데, 새로운 작품을 모아도 기존 작품 중 버릴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우리 교실의 수납 문제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 미련한 교사라고 흉을 본대도 어쩔 수 없다. 경력이 아무리 쌓여도, 우리 교실 속 물건 중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작품'일 테다.
짐정리 다짐
어느덧 10월도 중순을 지나고 있고, 아이들이 하교한 후의 빈 교실을 찬찬히 살피다가 이제 또 새로운 교실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만 하는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아이들의 손때 묻은 작품과 편지들을 아마 올 해에도 나는 버리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뻔질나게 읽는 그림책과 이야기책들은 물론,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책들도 버리지 못할 것임을 예감한다. 그러니 별 수 있나. 있는 줄도 모르고 올해 한 번도 꺼내 쓰지 못한 수업 교구들을 먼저 정리할 수밖에.
서랍장을 열고 내가 가진 교구와 수업 자료를 찬찬히 살펴본다. 각각을 매개로 성장했던 어린이들의 얼굴 혹은 어느 해의 교실 풍경이 눈앞을 스친다.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정리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제껏 그런 삶을 살아온 증인이 그 사실을 모를까?'시절인연'이란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나를 스쳐간 어린이들처럼 이 교구들을 흘려보내야겠다, 고 다짐을 해 본다.
헌것이 지난 곳엔 새것이들어올 자리가 생기니, 나와 함께하게 될새로운 물건들은 내가 만날 새로운 아이들과 더욱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줄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이루지 못할 꿈을 꾼다. 그게 언제건, 누군가가 마주할 나의 책상 상태를 걱정하지 않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다. 오늘은 정말로, 교실에서 그 쓰임을 다 한 물건을 하나 찾아서 정리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