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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인 것들

by 우먼파워

엄마는 여행을 무척 좋아하셨다. 하지만 아픈 허리로는 마음껏 떠날 수 없었다. 한 살 연상인 엄마는 공교롭게 생일도 아버지보다 일주일 뒤였다. 늘 아버지와 가족이 먼저였던 엄마는 회갑 잔치도 아버지 때나 하자며 사양하셨고 칠순도 역시 아버지를 핑계로 조용히 넘어갔다. 가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가족들에게 폐가 될까 늘 속마음을 숨겼던 엄마에게 나는 여행을 제안했다.


한 번도 함께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기에 이번만큼은 효도다운 효도를 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목적지는 경주,

2박 3일의 짧지만 특별한 여정을 준비했다. 다행히 선뜻 따라와 주셨고 우리 네 식구는 처음으로 엄마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출발하는 날, 두 분은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들떠계셨다. 주섬주섬 챙긴 여행 가방을 몇 번이고 다시 열어보며 필요한 물건을 빠뜨리지 않았는지 확인하셨고, 차에서 출출할까 봐 간식도 푸짐하게 챙기셨다. 자동차가 경주를 향해 달리자, 엄마 아버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연신 감탄하셨다. 도시를 벗어나 산과 들이 펼쳐질 때마다 좋아하시며 시골길의 정취를 만끽하셨다.


경주 한화 콘도에 숙소를 정하고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왕릉 등을 여행하였다. 젊은 우리 걸음을 쫓아다니느라 다리와 허리가 아프셨을 텐데도 전혀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어릴 적 내가 손을 잡고 따라다니던 부모님은 이제 느린 걸음으로 나를 따라오셨고,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을 아리게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마다 연신 미소를 지으셨다. 천년의 세월을 품은 불국사의 돌계단을 오르며 젊었을 때 다녀갔던 기억을 이야기하셨다.


수십 년 전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시는 아버지의 그 목소리에는 세월의 무게와 함께 옛 추억을 떠올리는 깊은 감회가 담겨 있었다. 두 분의 눈길은 계단 너머로 펼쳐진 전각들과 어우러진 푸른 하늘을 담고 있었고, 걸음을 멈출 때마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듯한 묘한 감정이 묻어났다. 엄마는 고즈넉한 불국사의 정원에서 한참을 머물며 그 고고함에 넋을 잃으셨고, 석굴암에서는 석가모니불의 온화한 미소에 눈을 떼지 못하셨다.


그렇게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본 것이 얼마 만이었을까. 문득 저릿한 전율이 온몸으로 흘렀다. 왜 더 일찍 모시고 오지 못했을까? 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을까? 불국사의 돌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마다 아쉬움이 겹겹이 쌓였다. 하지만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항상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셨던 엄마와 아버지는 내가 이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롱을 사주시고 에어컨을 사주시고 김치냉장고를 사주셔서 우리 집 살림은 이사 때마다 하나씩 늘어갔다. 그런데 정작 내가 어떻게 사는지, 이사한 집이 어떤지는 보러 오지 않으셨다. 딸이 사돈댁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혹여나 누가 될까 봐, 한 번도 걸음을 하지 않으셨다. 분명 딸의 새집이 궁금하셨을 텐데도 그 마음을 누르고 참으셨던 두 분을 딱 한 번 모신 적이 있었다. 그때도 사돈들 눈치 보시느라 안 오신다는 것을 억지를 부려 오시도록 했다. 그날이 우리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엄마 아버지는 복어 요리를 좋아하셨다. 처음으로 두 분을 모시는 자리인 만큼, 좋아하시는 음식을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복어 요리는 우리의 기억에 남을 만큼 훌륭했다. 그날의 복어 코스는 두 분의 입맛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쫀득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일품인 껍질 무침, 바삭바삭한 복어 튀김, 그리고 깊고 시원한 국물 맛에 자꾸 손이 가는 복어탕까지, 두 분은 음식이 나올 때마다 감탄하시며 행복해하셨다. 몇 달이 지나도, 몇 해가 지나도, 두 분은 그 복어 요리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심지어 오빠가 복어 요리를 사드렸을 때도

“둘째가 사준 그 요리보다 못해.”

라고 하시며 그 요리를 그리워하셨다. 하지만 그 복어 요리를 더는 사드리지 못했다. 그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맏며느리인 나는 명절이면 친정보다는 시댁이 우선이었다. 명절 전후에야 친정을 찾았고, 음식 한 번 제대로 해다 드린 적이 없었다. 이런 내가 어느 해인가 처음으로 소갈비를 준비해 갔다. 전날부터 고기를 사다 핏물을 빼고 좋아하실 엄마 아버지를 위해 정성껏 양념을 했다. 술을 즐기셨던 아버지께 최고의 안주는 돼지 불고기였지만, 그날의 소갈비는 술안주를 위해서도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는 음식으로도 최고였다. 항상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만 먹던 내가 부모님을 위해 처음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드시던 두 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엄마와 아버지와의 소중한 순간들이 왜 그리도 짧았을까. 불국사의 돌계단을 내려오며 느꼈던 아쉬움처럼, 엄마와의 많은 일들이 하나같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아픔을 안고 있다. 그 시간들이 왜 더 많지 않았을까, 왜 더 따뜻하게 다가가지 못했을까 자꾸만 되물으며 마음이 아려온다.


그때는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에 휩쓸려 부모님의 소중함을 눈앞에 두고도 자주 미뤄두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한구석이 쓰려 오고 그때 내가 놓쳤던 시간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엄마 아버지와의 많은 순간들이 이렇게 하나씩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아 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리움이 더욱 깊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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