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카페인 04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서정 Jul 10. 2024

7.17.



상황은 한층 악화됐다. 검사를 받고 온 것이 겨우 닷새 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종아리 전체와 팔꿈치 아래 피부가 검게 물들었다. 처음에는 통증과 함께 색이 변했는데 이제는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어느 날 보면 조금씩 늘어나 있는 식이었다. 그래서 푹푹 찌는 무더위에도 나는 늘 긴팔 긴바지 차림이었다. 그나마 회사 건물 안은 추울 정도로 냉방이 잘 되어 다행이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겨우 판매 실적 현황을 정리했다. 사실 이 서류는 어제 저녁까지 제출해야 하는 거였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이 일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파장은 기껏해야 부장이 화를 내는 정도의 작은 소동일 것이 명확했다. 파일을 첨부해 메일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야 조금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업무에서 벗어나 혼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피곤한 시선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기도 잠시.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과장이 나를 불렀다.


“김이지씨, 커피 주문 좀 받아. 오늘은 1회의실이야. 나는 아메리카노, 따뜻한 걸로.”

“네.”


병원 가던 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돌아보았다. 통증이 별로 없는 것 같으니 병원에 안가도 되지 않느냐는 말이 사무치게 아팠다. 그날 이후 나는 모든 일에 소홀했다.


1년여의 버릇대로 얼른 사무실을 뛰어나가다가 우뚝 멈췄다. 이렇게까지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걷고 천천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이 어색했다. 자꾸 빨라지는 걸음을 늦추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평소 같으면 3분도 안 되어 도착했을 텐데 오늘은 5분이 넘게 걸렸다.


점심시간이 끝나 한산한 카페에서 느긋하게 주문을 하고 제일 구석자리를 찾아 앉았다. 테이블 옆에는 아기자기한 흰색 파티션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앉아 1인용 소파에 몸을 기댔다. 어깨가 조금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눈을 감았다. 시큰한 느낌이 들면서 눈물이 났다.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몸을 돌볼 시간도 없이 일만 했던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내 기분이 나쁜 만큼 다른 사람들의 기분도 망치고 싶었다.


조금 고민을 하면서 앉아있는데, 문득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는 게 과장에 대한 복수처럼 느껴졌다. 흐뭇한 얼굴로 다른 복수 방법을 생각했다. 부장한테는 무슨 복수를 하면 좋을까. 과장은, 사수는, 윤대리는. 주문한 것과 전혀 다른 커피를 주고, 그 커피에 침을 뱉고, 실수인척 내 커피를 그들에게 쏟아버리는 상상을 했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커피 여덟 잔 나왔습니다.”


알바생이 주문한 커피잔 수로 나를 불렀다. 픽업대 위에는 누런 종이로 만든 캐리어 두 개가 있었다. 컵 네 개가 들어가는 캐리어 두 개에 나눠 담긴 커피들은 겉보기에 잘 정리된 느낌이었다. 나는 카페에서 쓰는 검은 빨대를 집어서 찬 음료가 든 컵에 꽂았다. 그리고 잠깐 고민하다가 내가 조금 전까지 앉았던 자리로 커피를 가지고 갔다. 파티션 뒤에서 팀장이 주문했던 아메리카노의 뚜껑을 열었다. 흰 김을 여리게 내뿜는 아메리카노는 컵의 입구까지 찰랑거렸다. 자주 해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입안의 침을 모아 소리 나지 않게 뱉었다. 커피가 왈칵 튀어 올랐다. 다시 컵의 뚜껑을 닫았다. 커피는 여전히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이전 03화 7.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