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하다 (適應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1. 일정한 조건이나 환경 따위에 맞추어 응하거나 알맞게 되다. ex) 새로운 직장에 잘 적응하다.
2. 생물이 주위 환경에 적합하도록 형태적ㆍ생리학적으로 변화한다.
3. 주위 환경과 생활이 조화를 이루다. 환경을 변화시켜 조화를 이루는 경우와 스스로를 변화시켜 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있다.
큰아들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와 함께 식사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엄마, 적응이라는 것은 잘살게 되는 게 아니라, 살게 된다는 거 같아요. “
"너는 적응한다는 것이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네. 근데 나도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적응이라는 게 살아남는 거네 싶기는 하다"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살아가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새로운 일이나 새로운 환경은 불편하기 나름이다.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편안해진다.
편안해지면 적응한 것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환경에 의해 소멸하거나 변형되는 것도 적응이다.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이 왜 내 마음에 남아있던 걸까?
성인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처음 해본 아들 입장에선 여러 가지 마음이 있었나 보다 추측해 본다.
일에 적응하면 행복하고 기쁘고 활기 넘치게 된다고 생각했을까?
이 말이 나에게 들어와 머무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아마도 오랫동안 '잘 살아 보고 싶다'라는 것을 나만의 기준으로 채찍질만 했던 그 마음을 아들을 통해서 알아차렸기 때문일 거란 생각에 닿았다.
나에게 잘 사는 건 이 나이엔, 이 정도의 지위와 이 정도의 집과 이 정도의 차와 이 정도 무엇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이 정도’라는 애매한 기준을 두고 지냈구나 싶었다. 지금 내 현실이 내가 생각하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취급했다.
이날 이후 나는 삶을 살아낸, 살아내고 있는, 살아갈 모든 사람을 존중하게 되었다.
결과에 상관없이 '삶이라는 과정'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살아 있음, 그 자체로 의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오늘도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