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 기간 마주 지위를 유지하다가 중단하신 지 십수 년. 경주마가 다 무어냐, 있어봐야 골치만 아프다며 잊고 사셨겠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돌연 마주가 되겠다고 하더니 매끈하게 생긴 암말을 하나 들인다. 그놈의 말이 뭐라고 동물 하나에 실로 지지고 볶으며 울고 웃는 모습을 꼬박 일 년을 지켜보셨다. 우습다면 우스웠을 꼴이었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다 싶으셨는지본인도 다시 해보겠다는 의중을 비치신게 벌써 꽤 된 이야기다.
아버님의 신마를 찾아드리는건 남편의 매우 기쁜 과제였다. 옆구리 쿡쿡 찔러 은근하게 내 희망사항도 좀 끼워 넣은건 덤. 경주마 운명 다 거기서 거기라면 할 말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포기하기 어려운 우리만의 문제, 성별. 암말 싫지 않으시다면 암말로 가겠다 말씀드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꼬맹이 물색에 나선게 사실은 작년부터다. 보통은 남편 혼자, 때로는 "이 말은 좀 같이 봤으면 좋겠어"하고 요청이 들어오면 같이도 내려갔던 제주도에서 망아지들을 보면서 나는 주로 하등 도움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얘 색깔 이쁘다", "쟤 참 착하게 생겼다".
시간은 흘러 6월 말이 되었다. 학교도 끝났겠다, 모처럼 휴가 삼아 제주에 내려갔다. 전 날 가서 하루 놀며 쉬고, 다음 날 아침 일곱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나름 강행군으로 목장을 돌았다. 남편이 진즉부터 체크해둔 아이였다. 한국 경주마 혈통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씨수말 "메니피"의 자마라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외엔 특별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온 김에 본다는 생각으로 육성목장에서 곧 있을 7월 브리즈업 경매 준비에 한창이던 꼬맹이 암말을 꺼내어 보여주시라 부탁을 드렸다.
진갈색 모색을 한 망아지가 관리사를 따라 마사 앞으로 나왔다.또각또각, 편자 잘 신은 굽의 경쾌한 울림과 함께 여름 햇살 아래 섰다.
속으로 입이 귀에 걸린다.
예쁘다. 표정을 감추는 게 힘들 정도로.
연이 닿는 건 참 순식간임을 또 한 번 느꼈다. 델피니때도 그랬다. 고르고 고르던 시간과 노력이 무색하게 결정은 순간이었다. 이번에도 비슷했다.그리하여 우선순위에서 꽤 밀려 있던 망아지가 우리 말이 되었다. 수 십 마리를 본 하루였으나 눈에 들어온 유일한 친구였다. 경매 일주일 전에 갑자기 식구가 된 이 말이 너무 예뻐서 "다프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늘 다프네가 과천으로 올라왔다. 델피니 때와 비슷하다면 장장 24시간의 긴 여행을 한거다.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자란 꼬맹이가 처음으로 물을 건너 먼 길을 왔다. 마방에 들여 굴레를 벗겨주니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밥그릇에 한번 킁, 해보는게 영락없는 애기다. 낯설겠지만 적응하리라고 믿는다. 새로운 환경이지만 나쁜 환경은 아니기에 미안함은 덜하다. 두 살, 개월수로 따지면 27개월쯤 되었다. 너무 어린 나이인데 당차게 제 할 일 다 해내며 오늘에 이른 야무진 꼬맹이다.
좋은 주인을 만났고,지긋지긋할 정도로 듬뿍 사랑해줄 사람도 생겼고, 말 수 적고 별 관심 없어 보이지만 뒤로는 누구보다 든든히 챙겨줄 사람도 있다.옆방 한 살 위 밤색 언니(델피니)가 까칠하고 시샘이 많은 편인데, 그래도 둘이 이왕이면 잘 맞아서 서로 의지하고 살면 좋겠다. 그나마 델피니는 수말보다는 암말을 좋아하니 희망을 걸어본다.
다프네(Daphne). 그리스어로 "월계수". 사랑에 눈이 먼 아폴론에게 쫓겨 붙들릴 위기에 처하자 월계수로 변함으로써 영원불멸의 존재로 승화한 그리스 신화 속 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