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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남녀 Sep 20. 2024

서사

馬主授業: 경주마 델피니



서사(narrative).

​언젠가부터 이 말을 많이들 쓰는 것 같다. 뜻 자체는 별로 어려울 것 없이 "이야기" 정도 될 텐데, 본래 문학 작품과 관련해서 조금은 전문적인 느낌으로 사용되던 용어가 요즘은 다양한 맥락에서 등장한다. 어떤 연예인을 "띄우는" 방법으로도 서사는 무척 중요한 요소가 된 듯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말 그렇게 서사가 중요하다면, 어떤 존재에게 혹은 그 존재의 삶에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경주마 델피니가 어제 일곱 번째 경주를 뛰었다. 과천 입사한 지가 언젠데 다른 말들 일이십 번은 족히 뛸 동안 고작 일곱 번이라는 보잘것없는 출전 회수이지만 그 한 번 한 번이 기가 막히게 힘이 들었다. 좀 뛸만하면 휴양을 떠나기 일쑤였던 와중에 어렵사리 쌓아온 여섯 번의 경주 이후 델피니는 데뷔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말은 힘이 없었고, 주인 속은 타들어갔다. 말은 뛰질 못했고, 주인은 고민해야 했다. 즐겁지 않은 선택지들을 몇 놓고 어떻게든 그나마 덜 나쁜 쪽을 골라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풀 죽은 모습으로 우두커니 마방에 서 있는 말을 보며 아무 내색 하지 않는 것은 매 방문 때마다 겪는 작은 도전이었다. 몸을 쓰다듬고 당근을 먹이고 사랑한다, 괜찮다, 힘내라 말해주고 다음 주에 또 보자는 명랑한 인사와 함께 돌아선 다음에야 눈물을 쏟곤 했다.


​델피니의 성적에 대해 물렁하게 생각했던 지난날들이 처음으로 후회가 되었다. 어떻게든 좋은 "스펙"을 만들어 주었어야 했는데,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 주기 위해, 매력적인 씨암말이 되기 위해 애가 좀 힘이 드는 한이 있더라도 더 독하게 밀어붙여서 그놈의 등을 한 번이라도 시켰어야 했나, 마치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적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성적이 안 나와도 잘한다 잘한다 그저 만족하며 해맑게 기뻐만 할 일이 아니었는데, 은퇴가 목전에 닥치니 그제야 우리 말의 초라한 성적을 실감했다. 델피니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이 바뀌어 봄이 왔다. 마방에 언제까지 애를 가두어 두는 것도 못 할 노릇이었다. 당초 델피니의 향후 거취를 정하기로 단단히 못을 박아둔 날이 기어코 다가왔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 후로 몇 주를 더 흘려보냈다. 이별 선고를 누가 먼저 할지 서로 눈치만 보고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했달까. 그렇게 3월이 다 갈 즈음 기적적으로 델피니는 훈련을 재개했다.

훈련 한 번마다 마음을 졸였다, 행여나 또 아프지는 않을까. 유리알처럼 두 손에 받혀 고이고이 발주대까지 모셔다 드릴 수만 있다면 그리 할 테니 한 번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뛰길 바랐는데 현실은 말이 너무 오래 쉬었다며 주행심사부터 전부 다시 보란다. 경주 여섯 번에 주행심사 세 번이니 그만큼 자주, 길게 쉬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델피니는 세 번째 주행심사를 무사히 봤다. 연이은 훈련도 모두 해냈다. 그 끝이 어제였다. 몇 주간 밥을 거의 먹지 않아서 역대 최저치로 몸무게가 떨어진 상태로 그렇게 데뷔 3년 차에 일곱 번째 경주, 국산 6등급 암말 한정 1300미터를 달리기 위해 발주대에 들어갔다.


사연 없는 말 없고, 감동 없는 이야기 없다. 아무리 시시한 말이라도 (바로 우리 델피니같이, 최소한 누군가의 눈에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명 모두가 뭉클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봐주냐 봐주지 않냐, 여기서 서사의 유무가 결정된다. 사랑, 관심, 소중히 여기고 안녕을 기원하는 선한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 존재에 시간을 쓰게 한다. 무미건조하게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을 움직임을 멈추고 내 귀중한 시간을 들여서 잠시라도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서사가 "발견된다". 서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포장할 필요도 없다. 억지 눈물과 감동을 쥐어짜기 위해 고심하지 않아도 된다. 현실을 애써 부풀릴 필요도, 화려한 미래를 점칠 필요도 없다. 델피니의 매 순간이, 이제까지의 여정이 그 자체로 "들음직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사랑, 그뿐이다.

 



경주 직후. 아름다운 말이다. 멋진 서러브레드, 발에 채이게 흔함과 동시에 오직 하나뿐인 국산 5등급 암말이다. ​






2022.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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