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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홍 Jun 27. 2024

프롤로그 인정하면 편해

Granted


신체검사 이후 3일 만에 날아온 승인 메일을 받고

얼마 전 동기 모임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금 떠올랐다.


나:

“한국이 아니면 다른 나라로 가면 되지. 중국에서도 맨땅에 헤딩했는데 어딜 못 살겠어.”


Choi:

“맞아.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 인간은 적응의 동물. 다 적응하게 돼있어.”


Lee:

“그러니까 너희가 다르다는 거야. 생각해 봐. 대한민국 청년들 중에서 어학연수 다녀온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중에서 대학원까지 간 사람은? 또 그중에서 현지 취업까지 한 사람은? 게다가 이직까지 한 사람은? 이미 경험한 게 일반적이지 않은 걸?”


나:

“아니, 난 내가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Choi:

“나도! 진짜 이렇게 평범할 수가 없는데.”

*놀랍게도 Choi는 중국 생활 15년, 현지 치대를 졸업하고 최근 베트남에서 일하다 귀국한 석사 동기다.


Lee:

“평범한 사람들은 국내에서 지역 옮기는 것도 큰 결단이라고 생각하는데 너희는 나라를 옮기는 걸 대수롭지 않아 하잖아. 당장 비용만 따져도 국내 이동은 비행기 값 같은 비용도 적게 들고 언어까지 통하는 데도 말이야.”


Choi:

“이해가 안 가. 돈이야 벌면 되는 거고. 국내는 진짜 일도 아닌데.”


Lee:

“보통 사람들은 회사 다니면서 월급날 맛있는 거 사 먹는 소확행을 즐기고 이게 남은 인생인 걸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고. 왜 사는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내가 지금 재미있게 사는 건지 그런 생각 자체를 깊이 안 해.”


나: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데. 인구수만큼 다양한 삶이 있는 거잖아. 남은 인생을 노예끼리 탑티어 노예가 되려고 고군 분투하면서 사는 거.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지긋지긋해서 소름이 끼친다니까. 진짜 이제는 말 그대로 닭살까지 돋아.”


Choi:

“내 말이. 월급날 맛있는 거 사 먹는 게 소확행인 건 알겠는데 그 행복이 일회성인 게 문제야. 이제 뭘 해도 도파민이 안 나와.”


Lee:

“그래, 도파민. 이미 커진 머리를 오지랖 넓고 다양성 부족한 이 나라에서 끼워 맞추려 하니 그게 어디 쉽겠어? 내 생각에는 그래서 너희가 입사하고 적응 기간 끝나면 우울해지는 것 같아.”


Choi:

“맞는 말이네. 근데 그럼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망했네.”


Lee:

“언제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엉덩이 가벼운 게 너희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인 거지. 남들보다 더 많은 걸 경험하고 즐길 수 있는 거. 근데 경험주의자는 대박 아니면 쪽박이니까 대박이 되도록 인생을 잘 설계하도록!”


Lee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날 머리를 한 대 얹어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평소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말 자체를 비웃을 정도로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라 자신했는데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매우 평범한 한국인이기 때문에 남들처럼 일반 회사원으로 적응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전제 자체가 틀렸었다니.


나는 한국이라는 세상에서는 유별난 사람이구나. 그럼 내가 적응하려고 더 노력해야 할까?

아니, 노력은 충분히 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나는 정말 많이 애썼다.


이제 애쓰는 것을 멈추고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야겠어.

그럼 일단 환경을 바꾸는 게 맞겠다!


달칵.


생각을 정리하자 새로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한 이후로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비로소 나와 맞지 않는 세상이 나에게 물러나 있도록 둘 수 있게 되었다.


회사의 해고 통보가 물리적 전환점을 제공했다면, 이 날의 대화는 나에게 의식적 전환점을 제공했다.


Thank you,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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