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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 인간 Jul 01. 2024

번민의 씨앗

첫 번째 이야기;  뭐라 하기에는 좀 애매한

아내와 나는 서로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공유한다.

스마트폰을 처음 쓰게 되면서부터 비밀번호를 공유했던 것 같다. 별스럽게 비밀스러운 내용도 없을뿐더러 혹시 서로에게 뭔 일이라도 생기면 핸드폰을 확인할 수 있겠다 싶어 공유하고 있다. 지금도 서로의 핸드폰을 몰래 열어보는 일은 없다. 관심이 없는게 아니라 의심이 없다. 어느 날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아내의 핸드폰을 보고 아주 오래전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도 10여 년 전으로 기억된다.

집안 어딘가 핸드폰을 놓아둔 것 같긴 한데 당최 찾을 수 없었다. 한 참 헤매고 있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아내가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을 받아 들고 내 번호를 누르다 화면에 뜨는 이름을 본 순간 웃음이 빵 터졌다. 번호는 분명 맞는데 내 이름이 아닌 '번민의 씨앗'이라니. 무슨 뜻인가 궁금해 아내에게 물었더니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번뇌와 고민을 만드는 씨앗. 넌 내게 그런 존재야."

마냥 웃을 수 없는 뭔가 묵직함이 얹힌 대답이었다. 수긍하자니 뭔가 찜찜하고, 그렇다고 딱히 뭐라 반문할 수도 없는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되뇌었다.

"그러네.."


그 시기는 이런저런 일로 아내와 갈등이 잦았다.

아내는 내게 불만이 있으면 조목조목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듣기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고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알았으니 잔소리 그만하고 나중에 얘기해."

아내는 내 반응에 서운해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부인이 잔소리를 하면 뭐가 불만인지 살필 생각은 않고 왜 짜증만 내는데?"

나도 뒤질세라 쏘아붙였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매사 불만인데?"

그 후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뻔하지만, 이런 불편한 분위기는 온전히 아이들에 전해졌다. 안타깝게도 우리 부부의 반복된 갈등 패턴이었다. 그러니 아내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번민의 씨앗'이 맞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번민이 아닌 평온을 주고 싶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아내와 갈등 상황에서 나의 미성숙한 반응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문제의 핵심은 아내의 잔소리에 대해 자동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짜증'이었다. 정신분석을 받으며 알게 되었다. '짜증'은 현상이고 그 내면에 담긴 뿌리는 '듣기 싫음'이라는 것을. 문제의 원인은 어머니에게서 답습된 정서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어릴적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겪은 부당함이나 서운함을 나를 붙들고 부단히 늘어놓으셨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께 싫다는 말은 못 하고 계속 하소연을 듣고만 있었다. 더욱이 제발 좀 그만하시라는 적대적 감정을 켜켜이 억누르고 살았다.


머리가 제법 굵어졌을 무렵부터 어머니의 하소연은 내게 참을 수 없는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한참 세월이 흘러 그 피해는 온전히 아내에게로 향했다. 남편에 대한 불만을 해결해 달라 대화로 요구하는 것은 아내로서 정당한 권리 행사다. 아내의 그런 불만을 살펴 현실적 범위 내에서 해결해 주는 것이 남편으로서 나의 의무다. 하지만 나는 아내의 정당한 요구를 어릴적 어머니께 듣던 하소연의 감정으로 느껴 짜증 섞인 반응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잔소리라 생각하는 '듣기 싫음'이 먼저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경험을 통한 깨달음과 자기반성은 변화를 가져왔다.

다행히 현실에서 부단한 노력과 아내의 도움으로 '아내의 불만'과 '어머니의 하소연'을 혼동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는 지난 세월 동안 켜켜이 담아두었던 서운하고 분노했던 일들을 내게 꺼내놓는다. 때로는 소나기처럼 짧고 묵직하게, 때로는 장맛비와 같이 긴 시간에 걸쳐 세세하게 쏟아낸다. 그것도 아주 격정적으로. 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아내의 말에 경청한다. 그리고 대부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마치 새로운 얘기처럼 묻는다.

"이번은 시즌 몇이야?"

그러면 대개 아내는 웃으면서 답한다.

"아직 한참 많이 남았어. 그냥 들어."

내가 묵묵히 듣고서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면 아내가 다시 묻는다.

"내가 하는 말에 아무런 동요가 없네? 내 말에 동의가 된다는 거야?"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으니 동요될 것도 없고, 아내가 무엇 때문에 속상해하는지 알고 있으니 딱히 반문할게 없다. 그러니 내 대답은 한결같다.

"당신 말이 다 맞지. 내가 참 미안하네. 진즉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어느 휴일 TV 채널 '오은영 리포트'를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는 어릴적 쌓인 정서적 경험들을 평생에 걸쳐 되풀이하고 있구나."

출연자 중 누군가는 어린 시절 겪은 부당함이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그 감정에 끄달려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어린 시절 잠깐 받은 따스함이 자양분 되어 평생을 버팀목 삼아 살아간다. 그러니 오은영 박사가 관찰 카메라 영상과 대화를 통해 간절히 찾고자 한 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중년을 훌쩍 넘긴 출연자들이 평생에 걸쳐 끄달리고 있는 정서적 경험이 뭔지 이해하고 나면, 그들을 꼭 안아주면서 그동안 고생했노라 말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정말 어렵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를 온전히 품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자식을 키운다는 것도 따스한 정서적 경험을 만들어 주여야 하는 막중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또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새삼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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