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소녀가 사랑한 것들 | 12
밤이 길어서
자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눈을 감으면 자꾸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떠다닌다. 졸린 눈을 도저히 감을 수가 없을 때 나는 잠들지 않기를 택한다. 마음껏 울고 욕하다 보면 지쳐 쓰러져 잠든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매일 잠드는 걸까? 남들이 눈을 감기 시작할 때 내 불안이 시작된다. 그렇게 긴 밤을 견뎌낸다.
약을 먹기 전, 잠드는 일이 나에겐 너무 큰 숙제처럼 다가왔다. 잠이 안 오는데 어떻게 자나요?
책을 읽어도, 글을 써도, 뜨개질을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들기 위해 뜨개질을 하다가 네잎클로버 수십 개를 뜬 적이 있다. 결국 울다 지쳐 잠드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꿈을 꾸지 않는다. 그만큼 푹 잠들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기 힘들었던 내가 잠이 쏟아진다니 신기했다. 자고 일어나면 필름이 끊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엄청 오래 잔 것 같은데 아직 오전이었다. 주말에는 오후 4시에도 일어난 적이 있는 나로서는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무리 깊게, 오래 자도 오전이라니. 아침을 일찍 시작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기댈 곳이 없어서
나는 정신과에 처음 방문할 때부터 약을 먹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약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약을 먹고 싶어 했다. 그랬던 마음 때문인지 약에 의존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졸린 약을 먹어서 그래.’, ‘부작용이 있어서 그래.’, ‘약을 안 먹어서 그래.’처럼 이전과 조금 달라진 내 삶의 모든 부분을 약을 먹기 시작한 탓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하루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아 약을 조금 줄이고 부작용을 잡는 약을 더 추가해 보자고 말씀하셨다. 약을 먹고도 자기 싫은 느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부작용이라고 하셨다. 알겠다고 하고 집으로 들어와 약을 먹었다. 그런데 약을 먹어도 부작용이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았다. 약을 먹었는데 왜 안 괜찮아지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약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는다는 걸. 너무 약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약의 영향이 0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약의 영향이 10중에 10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이었다. 얼마나 기댈 곳이 없으면 약에 기대게 된 걸까.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일어나기 위해서
나는 참 다행이게도 약에 의존하는 것 같다고 스스로 깨닫게 되었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같다. 약을 먹는 것만으로도 나는 괜찮아진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조금만 힘들어도 약을 찾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언젠가 약을 끊을 먼 미래에 내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도록 거리 두기를 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게 말이다.
약을 먹기 시작할 때, 약을 2~3시에 먹기도 했다. 그래도 항상 오전에 눈이 떠졌다. 아무래도 약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밤 11시가 되면 약을 먹고 12시가 될 때 침대에 눕는다. 지금부터 건강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미래의 내가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거리두기 뿐만 아니라 제때 먹고 제때 자는 건강한 생활, 규칙적인 생활도 필요하다.
약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날, 우리 같이 활짝 웃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