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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엄 Jul 03. 2024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나서

팔랑 인간 수난시대

(1).

  

어떤 영화를 보고 왔다. 실은 ‘어떤’보다는 ‘재미없는’을 가져다 붙여야겠지만, 밤이 다 되어 가도록 도대체 어쩌다 그 영화가 재미없었는지를 해명하다 보니 대충 뭉뚱그려 어떤 영화를 봤다고만 얘기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영화도 나도 살 것 같았다.

  

그 탓에 이젠 비밀이 됐지만, 조심스럽게 이 글에만 비밀을 털어놓자면. 그 영화는 올해 본 영화 중 단연 최악이었다. 이 영화 보려고 아침 일곱 시부터 일어난 게 억울했으며, 이 영화 주연을 한국 연예인 중 유일무이 이상형으로 삼은 나를 종일 미워했다. 왜 저 사람을 이상형으로 삼아서 이런 영화 보게 해? 안 그래도 무릎 연골이 엉망인데, 더 엉망인 영화 보느라 무릎 아파 죽는 줄 알았잖아. 스스로 따질 말도 해명할 말도 많은 탓에 영화 끝나자마자 시네필인 친구 몇 명에게 연락했고,


 그때부터 모두를 향한 해명이 시작됐다.


 나는 그 영화가 재미없었고, 나를 제외한 주변인들은 손익 분기점쯤이야 가뿐히 넘기겠다는 말을 서두로 삼았다. 이후 어떤 장면이 좋았으며, 어느 지점에서 이 영화는 ‘됐다’고 느꼈는지를 얘기하는 동안 남몰래 그 영화의 손익 분기점을 검색했다. 무려 200만 명이었다. 200만 명이나 극장을 들락날락할 만한 영화였다니. 왜? 어쩌다가?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또 나만 재미없는 사람이 될 테니, 입 꾹 닫았다. 꾹 다문 입이 답답했다.

  

왜 나만 재미없는 사람이 됐지?

왜 나만 그 영화가 재미없었던 걸까?

  

  




(2).

  

나는 팔랑귀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누가 어떤 영화를 추천하는 순간부터 스크린 주변이 어두워지자마자 재밌어지고, 그와 반대로 재미없다는 말을 들었다가는 아니꼬운 눈으로 영화와 대치했다. 심지어 남들에게 재미없는 줄 모르고 엔딩 크레디트의 끝까지 함께 보낸 영화라 한들 재미없다는 감상평이 주변에서 들리면 갑작스레 멀쩡했던 삭신이 쑤셨다. 그렇게 오래 앉아 있지 말걸. 그럴 만한 영화가 아니었는데. 이따위 후회도 갑자기 또는 가볍게 시작했다.

  

보다시피 나는 남의 감상평에 휘둘리며 살았다. 취향에는 주관이 머물 자리가 많아야 하건만. 틈만 나면 객관도 아니고, 남들 말에 불과한 것들을 취향 안에 욱여넣곤 했다. 그러다 작년이었나. 이러다가는 그나마 살아남은 취향조차 껍데기만 겨우 남겠다는 위기의식에 눈귀 다 틀어막은 채로 문화생활을 새롭게 시작했다.


 뭘 보거나 먹거나, 뭉뚱그려 무엇이든 처음 도전할 때마다 조언조차 듣지 않고, 냅다 시작했다. 예를 계속 영화로 들자면. 영화 보기 전후로 그 영화와 관련된 대화는 물론, 영화 제목조차 검색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일 년째. 냅다 나 혼자 시작하고 즐기는 순간이 습관으로 바뀌었고, 자연스레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된 점은 좋았다. 버려진 공간을 가만히 두면 자연이 알아서 자연으로 되돌리듯 내 취향 역시 나를 기준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으니, 싫을 리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십 분 전만 해도 재미없어서 이 바득바득 갈며 영화관을 나왔건만. 영화관 안팎으로 재밌다는 말이 연달아 들리고, 주변 사람들조차 재밌었다는 말만 거듭할 때. 이런 순간이 오면 옛 버릇 못 고치고, 아무래도 내가 영화를 허투루 본 것 같다는 의심에 시달리곤 한다.


왜 나는 내 취향을 존중하지 못하는 걸까.

이놈의 팔랑귀 때문인 걸까.






(3).

  

그렇다고 해서 또다시 휘둘리며 살기는 싫었다. 나도 줏대라는 걸 내세우고 싶었다. 남들 다 재밌다고 할 때 재미없다는 말 툭 뱉고 어깨 으쓱이는, 그런 사람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잠깐만. 이 역시 남의 취향에 의존하려 드는 버릇 아닌가. 고쳐야겠다!) 고로 이번만은 한 치 양보도 없이 재미없었던 장면과 별로였던 구간을 꺼내 보일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재미없던 부분을 직접 적기까지 했다.


 그래 놓고 십 분 만에 회군할 채비를 갖춘다. 앞으로 200만 명이나 볼 영화를 재미없다고 하는 건, 너무 형편없는 취향 같았다. 괜히 또 초조해하며 실컷 흔들리는 거다. 왜 이토록 유별난 취향은 싫어하는지, 그런 주제에 왜 또 보통의 취향은 낭만적이지 않다며 고개 돌리고 마는지. 종잡을 수 없는 팔랑 취향에 회까닥 돌 것 같았다.


 “하나만 제대로 대답해 봐.”

 “뭘.”

 “그 영화에서 제일 싫었던 장면이 뭐였어?”


 확실하고 긴 대답이 입천장까지 마중 나왔지만, 이놈의 팔랑 취향은 대답을 목구멍 밑으로 밀어내고자 팔랑팔랑댔다. 그러나 양보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팔랑 취향을 이겼고, 내 무시무시한 입이 열렸다. 말로 해서 다행이지, 메신저로 떠들었더라면 악플 잔치였을 테다. 제일 싫었던 장면은 없었어. 전부 싫었기 때문이야. 최악을 가리는 데에 우열을 가릴 수 없었고, 내가 그 영화에 대고 할 수 있는 호평은 그저 그 영화 주연 중 한 명이 너무 섹시했다는 거야. 그러자 친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기엔 넌 그 배우가 어떤 영화에 나오든 섹시하다 하잖아. 그러면 그건 영화에 대한 호평이 아니지.”

 “그래. 그렇게나 좋은 부분이 없었다고. 넌 이 영화가 제일 재밌다고 했는데, 미안해.”

 “미안할 것 없어. 넌 별로였던 영화를 극찬해서 눈치 보게 한 나도 미안할 건 없고. 우리는 그냥 각자 취향대로 영화를 본 거야.”

 “맞아. 그게 다야.”


 그게 다야.

 알아들었지, 팔랑 취향아.

  





(4).

  

이번에야말로 팔랑귀와 팔랑 취향에게 밀리지 않을 테다. 죽을 때까지 이 영화는 재미없게 기억할 것이다. 딱히 앙심 품은 것은 아니고, 그저 내 취향을 단단히 다지고 싶을 뿐이다. 그저 그런 날이다. 나만 재미없는 사람으로 보여도 좋고, 네 취향은 원래 고지식하고 꽉 막혔다는 말로 설득당하는 시간을 보내도 상관없다. 팔랑 취향에 대항하여 이 영화를 굳건히 재미없는 영화로 분류해야겠다. 왜 갑자기 이런 투쟁심이 태어났는지는 몰라도 태어난 이상 잘 돌보면 그만 아닌가.

  

 실은 이 투쟁심의 출처를 안다.


 그냥, 울적했던 오늘만은 한 시간 반이나 관객석에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나를 부정해선 안 됐다. 나라도 울적한 나에게 네 말이면 다 옳다고 해 주는 아군을 자처해야 하는 날이었다. 게다가 울적한 내가 하루 중 한 시간 반이나 나 자신을 속였을 리 없다. 울적해하느라 거짓말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나에겐 정말로 그 영화가 재미없었으며, 작은 위로나 웃음조차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남들과 좀 다른 눈으로 영화를 보면 좀 어때.

  





(5).

  

그러면서도 다음 주에 보러 갈 영화 예고편을 이미 다섯 번 넘게 봤다. 제발 이번만은 재밌어야 한다. 나도 거들먹거리며 ‘이 영화는 손익 분기점 무조건 넘긴다!’라든지, 재미있는 영화를 재미있게 주고받는 이들 사이에 껴서 마음 편히 웃고 싶다. 좌불안석은 이번 영화로 끝이었으면 좋겠다.

  

좋겠는데,


그러려면 팔랑귀에 이어 팔랑눈까지 되겠다는 예감이 불길하게 스민다. 모르겠다. 팔랑눈과 팔랑귀로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보다는 가끔 남들과 다른 눈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이 더 낭만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보편과 낭만 중 하나를 고르라면 무조건 낭만일 테니까. 이렇듯 여전히 울적하고 갈팡질팡하는 나는 팔랑 인간 그 자체다. 그러나 팔랑 인간인 나를 향한 감상평은 아직 듣지 못했으므로 또 휘둘리기 전에 미리 속 시원하게 말해야겠다.

  

하나. 오늘 본 영화 진짜 별로였다. 내 원수가 본다 해도 붙잡은 다음 한 마디씩 물고 늘어져서 그가 영화 상영 시간을 놓치게 해 주고 싶을 만큼.


둘. 울적한 날에도 내 마음 하나 챙기겠답시고 영화관에 간 내가 나는 너무 든든하다. 아무리 줏대 없이 팔랑거려도 나 자신에게만큼은 든든한 내가 나는 정말 좋…진 않아도 정말, … 정말.


벌써 흔들리고 있다.

아, 이 팔랑 인간을 어쩌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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