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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엄 Jul 01. 2024

책 임보를 마치고 나서

무책임하기만 했던 책 임시 보호 기간을 반성합니다.


 

(1).

 

임보. 임시 보호의 줄임말.

 

2주간 임시 보호해 주었던 책을 내일이면 다시 도서관에 돌려주어야 한다. 2023년에 출간되었지만, 아직도 신간 도서 서가 맨 구석에 숨어 사는 데다가 아무도 읽지 않았는지 빳빳했던 책이었다. (제목은 밝히지 않겠다. 그 책이 인기 없는 책이라는 걸 그 책도, 그 책과 언젠가 만날 사람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으므로) 나만은 꼭 읽어 주겠다며 도서관 갈 때만 챙기는 가방 안에 담아 온 지도 2주째. 미안하게도 그 책은 여전히 빳빳했다. 내 방 작은 책꽂이에 꽂혀, 푹 쉬다가 도서관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책은 푹 쉬었을까. 도서관 출신 책이라면 많은 사람이 읽어 주길 바랐을 텐데.

 

진심으로 웬만하면 읽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책 빌릴 때는 이후 2주간 일정을 웬만하면 확인해 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작정 데려와 놓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임시 보호자가 되므로. 언젠가 인터넷에서 어떤 사서가 남긴 글을 읽었었다. 읽지 않아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책은 대출 이력이 남음으로써 조금 더 오래 도서관에 머물 권한이 생긴 거라고도. 그래도 내 방에 틀어박혀 지낸 덕분에 수명이 늘어난 것은 다행이었지만, 왜인지 자꾸 씁쓸했다.

 





(2).

 

여태 빌린 책은 무조건 다 읽고 돌려줬었다. 아무리 바빠도 빌린 이상 끝까지 읽은 다음 독후감까지 길게 남겨, 도서관에 되돌려주는 나였다. 내 독후감이 광활한 인터넷을 떠돌며, 또 다른 누군가가 빌리든 사든 어쨌든 그 책에 관심을 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영향력 하나 없는 사람답지 않게 책 좀 봐달라면서 안달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번 책은 그러질 못했을까. 씁쓸할 뿐 아니라 감정이라곤 없을 책에 미안했다. 단 한 장도 읽지 않은 게 미안해서, 나만 읽지 않은 거라고 믿으며 어제 잠들기 전에 책 제목을 조심히 인터넷에 검색했었다. 그런데 젠장. 그 책 리뷰가 1페이지도 안 됐다. 나만은 무관심해선 안 될 책이었다. 나라도 꼼꼼하게 읽고, 광활한 인터넷 세상 어딘가에는 너를 다 읽은 사람이 있다는 흔적을 남겨야 했었다. 그러면 이 지구 어딘가에 사는, ‘인기 없는 책이지만, 나라도 읽으면 이 책 출판사가 또 이런 책을 내주겠지?’하고 흔적 남기는 누군가가 다음 흔적을 남겨 주었을 텐데. 끝내 그러질 못했다는 죄책감은 끊임없이 “한심해!”하고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이 책은 그 누구의 추천도 받지 않고, 내 취향만 존중해서 빌린 책이었다. 귀가 얇아도 너무 얇은 나는 주변 추천 또는 인터넷 각지에서 추천하는 책 위주로 읽는다. 그런데 이 책만은 달랐다. 앞서 말했듯 이 책 리뷰는 1페이지 채 되지 않았으며, 내 주변에 이 책을 아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저 2주 전쯤 도서관에 갔다가, 더위 좀 식히겠답시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중 맞닥뜨렸다. 맞닥뜨리자마자 제목에 홀려, 집어 든 다음 한참이나 읽다가 얘만은 우리 집에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진짜로 데려만 왔다.

안 읽었다.

내 취향에만 의거했다고, 그렇게 의기양양해 놓고서는.

 





(3).

 

내일 나는 2주 내내 안 읽어 준, 그저 임시 보호만 해 준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가야 한다. 아직도 주름이라곤 없고, 손때 묻지 않은 저 책을 다시 처음 만났던 자리에 두고 와야 한다. 이대로 보내기는 싫어서 이런 상상도 해 봤다. 도서관에 가서 반납하자마자 다시 빌리는 상상.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일단 저 책 말고도 임시 보호 중인 책이 네 권 더 있었다. 당연히 2주 안에는 읽을 줄 알고, 일주일 전쯤 네 권 더 임시 보호를 자처한 탓이었다. 게다가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단순히 표지가 예쁘다거나 제목이 재밌어 보인다는 이유로 아예 데려오고 만 책도 있었다. 그뿐인가. 이번에야말로 향후 2주간 일정을 확인해 봤는데, 2주 안에 책 두 권 읽어도 기적인 일정이었다. 즉, 저 책 말고도 임시 보호 끝에 도서관으로 털레털레 돌아갈 책이 두 권 정도 더 있다는 뜻이었다.

 

…….

정말이지, 무책임한 임시 보호자다.

 

그다음으로 또 다른 상상을 하려다가, 아예 현실에 저 책을 들여놓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나타났다. 앞서 말했듯 나는 독후감을 쓴다. 인터넷에도 독후감을 남기지만, 자필로 독후감을 남기는 공책과 메모 패드도 있다. 원래의 나였다면, 다 읽고 나서야 공책과 메모 패드에 책을 남겼겠지만. 꼭 다시 데려와서 이번에야말로 읽어 주겠다는 결심을 증명해 보이려면, 내일 내 곁을 떠날 저 책 제목을 적어야 했다. 고로 그 책 제목을 다짜고짜 적었다.

 

바쁜 2주가 지나가고 나면 그 책과 처음 만난 자리로 가야 한다. 자필로 남긴 책 제목 밑으로 독후감을 남기지 않으면, 계속 초조해지는 나를 안다. 거슬려서 미칠 것 같은 나도 안다. 2주 뒤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그 책을 데려올 테고, 보란 듯이 독후감 남길 나를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 2주 뒤에 다시 내 방으로 데려올 때까지 다른 사람 눈에도 띄어보고, 다른 사람 집도 구경하다가 내게 오기를. 다음번에는 손때 묻은 널 보고 싶으므로.

 

여기까지 적으니 내일 도서관 갈 생각에 몸이 무거워지질 않는다. 그저 얼른 데려다주고, 얼른 다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이런 무책임하고도 미래 지향적인 임시 보호 기록을 남긴 점은 미안하지만, 미안한 마음을 이어가지 않으려면 행동하면 된댔다. 행동 개시까지 2주 남은 지금. 얼른 이 글을 마치고, 아무리 책을 책꽂이에 두어도 먼지인 양 수북이 쌓인 일을 해치우러 가야겠다.

 





(+)

 

실은 저 책 말고도 임시 보호만 하고, 도서관으로 돌려보낼 책이 한 권 더 있다. 다행히 이 책은 이백 장 정도밖에 남질 않아, … 오늘 잠자기는 글렀다.

 

부디 2주 뒤에 너까지 다시 데려오지 않기를.

제발 2주 뒤에 네 후속작을 빌려오기를! 부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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