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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엄 Jul 04. 2024

엄마들 사이에 끼워지고 나서

원래부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1).


안 그래도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더 빠글빠글 볶고 싶어졌다. 그 마음에 무작정 엄마 손 붙들고는 엄마가 자주 가는 미용실로 갔다. 이럴 때도 엄마는 싫다는 말 한 번 없다. 그렇게 내가 좋은가. 아니면 MBTI 맨 앞자리가 E인 사람 특징일까. 마침 미용실에 다 왔다. 우리 동네가 한눈에 보이는 중이었다.


그 미용실은 어떤 가게든 석 달 이상 못 버티는 우리 동네 초입을 십여 년간 맡고 있다. 그 누구든 우리 동네로 들어오려면 그 미용실을 지나가야 했다. 덕분에 나마저 그 미용실 사장님을 십 년 넘도록 마주치든 스치든 했다. 내가 교복 차림이었을 때는 결혼도 안 한 여자가 동네에 젊은 애들이나 갈 미용실을 차렸다며 떠들썩했었고, 내가 점차 사회인으로 찌들어 갈 즈음엔 쌍둥이인지 뭔지 모를 아이 둘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동네에서도 거창하게 열렸으며, 지금은.


“손님 아니었어요?”


미용실 사장님의 아이 둘이 교복 차림으로 미용실을 쏘다니고 있었다. 세월은 빠르다는 고릿적 얘기를 주섬주섬 머릿속에서 꺼내기 직전이었다. 미용실 사장님과 엄마가 떠들기 시작했다. 엿듣는 내내 세월이 멈춘 줄 알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십 년째 같은 주제 안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식 얘기였다. 다 컸거나 다 커 가는 자식이 각자 미용실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 또는 책만 보든 말든.






(2).


이름을 알려 주었음에도 삼 초 만에 까먹을 만큼 어려운 기계가 내 머리를 빠글빠글하게 만드느라 바쁠 때였다. 질리지도 않는지 두 시간째 미용실은 자식 얘기로 소란스러웠다. 그로는 모자랐나. 어느덧 두 사람은 보란 듯이 나를 주제 삼아 떠들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엔 두 사람 모두 내게 말을 걸었었다. 왜 머리를 더 볶고 싶어졌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책만 읽었는지. 지금 하는 일은 잘되어 가는지.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말이 없는지. 말이 없다니! 그 모든 말에 열심히 대답하긴 했다! 문제는 내 목소리가 두 사람의 데시벨에 계속 묻혔고, 자식 얘기에 열 올리던 두 사람이 차츰 대화 속도를 높이느라 비교 대상이 된 내 대답은 현저히 느려터진 속도에 이르렀다. 결국, 내 대답을 원하는 만큼 수거하지 못한 두 사람은 내 대답이 끼워졌어야 할 자리에 나를 주제 삼은 대화를 끼웠다.


“근데 혼자 오시지, 언니는 왜 데리고 왔대?”

그 대화에 신호탄 쏜 것은 미용실 사장님이었다.


“쟤 낯가려서 그래. 무조건 같이 가 달래.”

신호탄 소리에 맞추어서 엄마가 대화 안으로 바투 붙었고, 도무지 나를 주제 삼은 대화에 파고들 자신 없었던 내가 일부러 책을 더 열심히 읽을 즈음이었다.


“마흔 넘으면 안 그러겠지. 낯가리는 것도 나이 제한이 있으니까.”

엄마가 기어이 나를 그 대화 안으로 끼워 넣었다. 물론, 엄마는 전혀 의도하진 않았을 테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글감 못 지나간 내 탓이다. 그때 엄마가 한 말은 엄마가 좋아하는 드라마 속 대사 같았다.


“그러기에는요, 언니. 저는 마흔 넘었는데도 낯가려요.”

미용실 사장님의 대답도 제법 드라마 대사 같아서 벌어지려던 입 도로 닫고 둘을 계속 번갈아볼 때였다.


“아. 근데 애들 학교 가면 낯설고 불편해 죽겠어도 말을 못 참겠어요. 이게 낯가림에 나이 제한이 생긴다는 걸까요? 나 정말, 우리 애 위해서 한 마디라도 의견 내고 싶어. 그러고 나서 후회는 또 얼마나 하게요.”


“선생님이 피곤해하거나 상처받을 정도로 의견 낸 게 아니면 말한 것에 후회는 하지 마. 엄만 원래 다 그래.”


이후 두 사람은 뭐 그렇게 웃기고 좋은지 한참이나 웃었다. 나만 넋 놓은 채 그 둘을 구경했다. 두 사람은 오늘 아침에 보다가 만 영화 속 어떤 장면을 닮았다.


오늘 아침에 본 영화는 엄마와 딸을 다뤘고, 보다가 끝내 멈춘 장면은 딸이 인생을 실패한 이유 대부분을 엄마에게 전가하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이 떠오른 ‘어떤 장면’은 실패한 이유까지 떠맡기는 딸에게 농담이라도 건네려 애쓰는 장면이었다. 엄마는 원래 다 그래. 엄마는 원래 다 그렇다기엔 오늘 아침 나는 ‘어떤 장면’을 명장면이라면서 극찬했는데. 명장면은 특별한 장면이건만, 엄마는 원래 다 그렇다고 하면. 그러면 엄마는 원래 다 명장면인가.


마침 머릿속에서는 보다가 만 영화의 연장선이 시작되고 있었다. 정확히 구분하자면 영화의 연장선인 척하는, 질문 꾸러미였다. 질문부터 밝히겠다.


엄마들은 왜 그러나요.

왜 원래 다 그러나요.






(3).


영화의 연장선인 척하는 장면 1.


비가 쏟아지는 날이다. 학교 좌측 문과 우측 문, 중앙 현관에 엄마들이 득실댄다. 그날 아침, 기상 캐스터가 비 예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성거리고, 두 눈으로 헤매기를 잠시. 자석이라도 된 양 각자 엄마와 자식을 속속들이 찾아내고,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학교는 차분해진다. 그러나 내 마음은 차분해지지 못한다. 이젠 나만 남았기 때문이다. 우산은 없다. 나만 남았으니까. 엄마도 없다. 나만 남았다니까. 억세게 내리는 비를 엄마 대신 노려본다. 애초에 우산 안 챙긴 사람은 나면서 애먼 엄마에게 화가 난다. 화난 만큼 힘껏 웅덩이만 골라 달리며 집으로 간다.


나는 왜 그렇게 못됐었을까요.

엄마는 왜 학교에 와 주지 못했을까요.


영화의 연장선인 척하는 장면 2.


현관문 벌컥 연다. 막 씻고 나온 엄마와 눈이 마주친다. 내 눈엔 엄마가 무지 나른해 보인다. 퉁명해진 낯과 대답으로 “다녀왔습니다.”하고는 방문 쾅 닫는다. 일상 깨지는 소리에 엄마가 곧장 방문 연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 보면 모르냐고, 왜 우산도 안 가져다주냐고 성질낸다. 엄마는 의기소침해진다. 친구한테 씌워 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 의기소침한 말이 나를 탓하는 것 같다고 우긴다. 친구는 친구네 어머니가 데리러 왔단 말이야! 그래서 또 성질낸다. 엄마는 다음번엔 우산을 현관문에 둘 테니, 여름엔 비 오든 안 오든 맨날 우산 챙겨서 가라고 한다. 데리러 올 생각은 안 하지. 툴툴대며 씻으러 들어가 버린다. 쾅, 또 문 닫힌다.


엄마는 왜 화내지 않았나요.

엄마는 왜

내일도 우산을 가져다주러 오지 못 했을까요.


영화의 연장선인 척하는 장면 3.


실은 그 엄마는 그날도 공장에서 일하고 왔다. 부업으로는 손댈 수 없이 망가진 가계를 지켜내고자 내과 의사도 만류한 공장에 열몇 시간이나 머물렀다. 게다가 내일도 가야 하고, 올여름 내내 가야 한다. 그래서 사춘기 온 딸을 내일도, 올여름 내내 데리러 갈 수 없다. 딸이 알아주면 좋을 텐데, 몰라준다. 그래도 그 엄마는 하소연하지 않으며, 묵묵히 또는 낑낑대며 우산꽂이를 베란다에서 현관으로 옮긴다. 딸이 좋아하는 우산을 맨 앞으로 살짝 당기기도 한다.


그 여름 내내 엄마는

현관문 앞 우산꽂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나요.



영화 감상평인 척하는 늦은 반성문.


오늘 본 영화 제목은 ‘가족이라서 문제입니다’였고, 제목보다 중요했던 장면은 회사에서 잘린 딸이 그 사실을 하소연하다가, 인생을 조금 더 진지하게 살아보라는 엄마 말에 문 쾅 닫고 나가는 장면이다. 쾅 닫힌 문에 대고 엄마는 인생의 답은 너만 찾을 수 있다고 외친다. 내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다. 아예 다른 장면일 수도 있다. 그저 내 기억과 버무리느라 문이 쾅 닫혔는지도 모른다.


또한, 영화 속 그 딸은 본인이 회사에서 잘린 건 알았지만, 엄마가 인제 그만 작가로 돌아가서 다시 본인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걸 모른다. 그러나 현실 속 그 딸은 이젠 안다. 이제야 안다고 해야 할까. 이제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도 엄마 마음을 이해한다. 심지어 남의 엄마인데도. 인생의 동반자를 고민으로 삼은 것은 엄마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이젠 안다.


그런데도 현실 속 그 딸은 아직 궁금하다.


엄마 인생에서도 고민이 동반자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엄마는 늘 나를 위해 주지 못해서 안달이야? 엄마도 오후 일정이 있었을 텐데, 왜 나랑 미용실에 있어 주는 거야?


이러면 엄마는 대답한다. 엄마는 원래 다 그래.

그놈의 엄마는 원래 다 그래.






(4).


오늘로써 평생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정확히는 오늘 오후 다섯 시 이십칠 분에 한 결심이다. 오후 다섯 시쯤. 그때도 나는 엄마와 미용실 사장님의 대화 주제가 늘 자식인 점, 더 나아가 엄마는 원래 다 그렇다는 말에 동시에 터뜨린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다섯 시 십몇 분쯤 집에 놀러 온 이모에게도 물었다.


“이모. 이모는 이모 아들이 부당한 일을 겪으면 부당하다고 말할 거야?”

“부당한 일? 나쁜 일 말하는 거야?”

”응. 나쁜 일. 근데 걔들이 직접 따질 수 있을 만한, 사소한 나쁜 일인데 이모 아들들은 참겠대. 그러면 이모가 대신 따지러 갈 거야?”

”당연하지?”

“왜? 이모는 반품해 달라고도 잘 말 못 해서 맨날 우리 엄마 시키잖아.”

“야! 그건 내 일이라서 그렇지. 자식 일이면 불이라도 나는 가지.”


불인 걸 알고도 가겠다는 마음. 심지어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웃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도무지 저들처럼 사랑할 자신이 없기에 오늘로써 확고히 결심했다.


평생 엄마가 되지 않을 거다.


그 딸은 영원히 딸이고 싶다. 내가 엄마가 되어 불이라도 뛰어들면 우리 엄마도 뒤따를 텐데, 싫다. 세상에 그런 마음들이 많아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그런 마음들이 너무 애달파서 싫다. 어릴 땐 불속에서 엄마를 기다렸겠지만, 이제는 영화에 나오는 엄마 역할이 아픈 것조차 싫어졌으니까. 그러므로 난 엄마가 되지 말아야겠다.


그냥, 그 딸은 영원히 딸이고 싶다. 퇴근길마다 데리러 오는 아빠 차를 기다리고 싶고, 출근길 내내 잘 가는지, 가기 전에 뭘 먹긴 했는지, 옷은 잘 챙겨 입었는지 묻는 엄마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싶다.


그냥,

그 딸은 그들만큼 사랑을 할 수 없다.






(5).


언제였더라. 언제였든지 간에 나에게 눈치도 사회성도 없었던 시절.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무작정 아빠 생일 선물로 책을 준 적이 있다. 우리 집은 내 방 제외하면 책장이 없다는 점을 밝힌다. 이러면 아빠 기준 가장 쓸모없는 선물을 줬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겠지. (심지어 장르 소설이었다.) 이후 고작 일주일 만에 아빠가 내게 그 책을 내보였는데, 책엔 손때가 흉할 만큼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런 아빠가 이번엔 내 브런치 구독자 중 하나가 자신임을 넌지시 알렸다.


참 나.

글자 읽기 귀찮아서 제품 설명서도 안 읽는 아저씨가 왜 저러나 싶다.


실은 왜 저러는지 아는데, 저러고 마는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어서 왜 저러나 싶은 거다. 나는 나 아닌 누군가를 아빠 또는 엄마만큼 사랑한 적도, 사랑할 자신도 없다. 사랑 많이 받고 자라기나 했지, 사랑 많이 주며 자란 적은 없었다. 어떻게 그래. 나를 이렇게나 사랑할 수 있다고? 어떻게 그래. 이러면 또 엄마는 다 그렇고, 아빠는 다 그렇다고 하겠지만. 이모들은 너도 애 낳으면 그렇게 된다고도 했지만.


나는 사랑이야말로 재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재능으로 촌각을 다투는 곳, 그게 사랑 같다.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사랑이면 사랑한다는 말이 왜 지구에 존재하겠어. 어차피 다 할 건데, 구태여 단어로 만들어서 가장 떨리는 순간 주고받을 필요 없지. 아무나 다 사랑할 줄 알면 사랑을 소재 삼은 예술 작품이 왜 인류와 내내 함께하겠냐고. 그러니까, 원래 엄마는 다 그런 게 아니라 그들이 태어나기를 사랑이라는 재능에 타고난 사람들인 거다.


아마 엄마와 아빠의 재능은 언니가 다 물려받은 것 같다. 그와 달리 사랑에 도무지 소질 없는 나는 엄마가 되어선 안 되는 거다. 비정한 부모가 되어, 엄마라는 단어를 더럽힐 테므로. 부모와 사랑은 동의어여야 한다는 세상을 쥐고 흔드는 악당으로 등장할 확률은 무려 100이다. (난 정말로 악당이 되고 싶지 않다….)


사랑에 타고난 사람들이 사랑만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나 같이 사랑에 범재인 사람들은 그냥 좀, 사랑받는 순간을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당연시 여기느라 그들이 사랑만 하기엔 힘겨운 순간을 겪지 않도록. 이렇듯 사랑에 타고나지 못한 나는 사랑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때로는 시기하고, 또 때로는 서툴게 사랑 비슷한 걸 주면서 살고 싶다. 그렇게라도 사랑에 끼워져서 살고 싶다. 오늘처럼.






(6).


그러니까 아빠, 보고 있다면 사랑 비슷한 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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