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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엄 Jul 05. 2024

왜 생각이 많아지는지 생각하다가

생각 많은 사람을 찾습니다


(1).

 

새벽부터 자다 깨다가 했다. 심지어 저녁까지 아파서 자고 깨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 사이마다 생각이 들어찼다. 생각도 카테고리별로 분류해 둬야 한다면 오늘은 오늘이라는 카테고리 안으로만 대충 욱여넣을 수 있을 뿐, 대중없는 생각이 빗발치는 하루였다. 워낙 생각 잉여 인간이라 생각 일부라도 뜯어내고자 마련한 달리기 시간 중에도 생각은 내 머릿속을 물컵 삼았다. 오늘 나는 한 방울만 떨궈도 흐르기 직전인 물컵을 쥐고 이십오 분이나 달려야 했다.

 





(2).

 

종종 지하철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생각하고 있기는 할까.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끝없이 뭐든 제공해 주는 휴대전화를 보며 뭘 생각할 수 있기나 할까. 그러다가 문득 나 역시 휴대전화를 끝없이 끌어내리면서도 단 하나의 생각조차 끌어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도 사람이고, 옆 사람도 사람이며, 지하철 속 모두 사람이므로 우린 다 생각하고 있을까.


이따금 SF 영화나 판타지 영화에나 등장하는 이능력자가 이럴 때마다 참 부럽다. 남의 생각을 듣는 이능력자 말이다. 나도 남의 생각을 좀 훔쳐 듣고 싶다. 뭘 그렇게들 생각하는지. 나는 또 뭘 이렇게나 남 생각을 하고 앉았는지. 속으로 삭이는 하소연이나 생각 말고, 남 생각을 엿들으면서까지 남에게 “나도 그래.” 이 한마디를 듣고 싶은 걸까. 아니면 남 생각으로 옮겨 탐으로써 생각하기를 멈추고 싶은 걸까. 모르겠다. 그저 몸이 무거웠다.

 

웬만하면 생각이 범람하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다.

 

서른 살이 되며 겨우 고친 악습이었다. 이십 대 때까지만 해도 나는 누가 말 걸기도 싫어할 만큼 우울한 인간이었고, 그 싫은 마음 겨우 해치우고 말 한마디 걸자마자 후회하게 할 정도로 울적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하루마다 찾아오는 기회고, 그 기회를 울적한 생각에 죄 뺏기지 말라는 충고에 차츰 머릿속을 비우는 연습에 매진했다. 연습은 반드시 결과로 번진다지. 그 말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삼십 대에 이르러서야 나는 ‘우울한 생각으로 하루를 다 날려 먹는 인간’에서 졸업했다. 그러나 졸업한 지 십 년도 훌쩍 넘은 학창 시절을 이따금 추억하듯 한두 달에 한 번쯤은 우울한 생각에 하루를 다 바치던 시절로 되돌아가곤 한다. 지금이 그렇다. 웬만하면 한두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월경에 울적한 나를 전가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만은 무책임하게 다 월경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그냥 그렇게라도

졸업장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정말 악착같이 받아낸 졸업장이므로.

 





(3).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은 사주 광신도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건네면 올해 내 사주가 어떤 흐름으로 꾸며졌는지를 대답으로 주는 사람이다. 그러기를 벌써 3년째. 처음에는 아무리 알려 줘도 뭔 소리인지 알 수 없어, 고개만 끄덕였던 내가 내 사주를 남에게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서당 개 정도는 된 거다.


뜬금없이 그 사람 얘기는 왜 하냐면, 그 사람이 처음으로 내 사주를 봐 준 날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그때 그 사람은. 본인 생일은 곧 죽어도 안 알려 주던 그 사람은. 별안간 내게 생년월일은 물론이거니와 태어난 시간까지 말해 달라고 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다 알려 주자마자 놀랍게도 내 인생을 쭉 읊더니 정곡까지 후벼 팠다.


“생각이 너무 많은 사주야. 한평생 생각만 하다가 가.”

 

사주대로 살고 싶지 않다. 실은 사주대로가 아니다. 나는 늘 남의 예상 안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안달이다. 남이 예견한 대로 살 바에는 정반대만 고르다가 쫄딱 망하고 싶던 적도 있다. 게다가 생각만 하다가 ‘가다’니. 간다는 것은 저승사자를 만난다는 뜻 아닌가. 언제였더라. 누군가가 내게 저승사자는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나타난댔는데, 누구 얼굴을 가져올지는 몰라도 (엄마 얼굴을 훔칠 확률이 가장 높지만) 그 누군가와 이런 대화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어?”

“생각하면서 지냈지.”

“그랬구나. 정확히 뭘 생각하면서 지냈어?”

“이것도 생각하고, 저것도 생각하고 그랬지.”

“생각 말고는 뭐 했어?”

“뭘 하든지 간에 생각은 무조건 했지. … 왜 그런 표정이야?”

 

이런 대화 말이다. 사람이 너무 울적해 보이는, 이런 대화 말이다.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일 텐데, 그 앞에서 칙칙한 옷차림일 것도 같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인생이어도 가장 사랑했던 사람 앞에 설 때는 그 인생에 가식과 허세를 마구 칠해 줘야 하는데, 생각만 하다가 간다니. 가식도 허세도 다 잃고 생각만 남는다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그때부터 생각 멈추기 연습을 꾸준히 했다. 차츰 시선이 초점 잃고 방황하려 하면 다급히 손이라도 움직였다. 그러고는 머릿속 정중앙에 둔 STOP 버튼을 연신 눌렀다. 생각하지 마! 생각 금지! 차라리 뭘 해! 그렇게 수많은 일을 벌이고, 수시로 고장 나는 생각 STOP 버튼을 계속 교체해 주며 살았건만. 왜 아직도 한두 달에 한 번쯤은 이놈의 생각이 죽지 않고 되돌아오는가. 좀비도 아니고. 설마 내 생각은 내가 곧 좀비로 바뀔 거라는 전조 증상인 걸까.


이쯤에서 잠시 글쓰기를 멈췄다.

좀비물까지 곁들이며 또 생각하고 앉았다.

 






(4).

 

대체 어떻게 하면 아무 생각도 없이 살 수 있을까.


누군가와 가까워질 때마다 습관처럼 묻는 말이 있다. 무슨 생각해? 널 생각한다는 대답이 듣고 싶은 마음도 분명하지만, 그보다 분명한 것은 모두의 머릿속이 나만큼 생각으로 어질러진 모습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모두가 자다 깨다 하는 사이에 무의식이 집어 든 생각과 맞닥뜨리기를. 몸이 아파서 꼼짝도 못 할 때조차 이놈의 머릿속은 분주히 생각들을 옮기다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생각 일부를 망가트리기를.


왜 이런 나쁜 소망을 가지고 사는지 묻는다면. 묻지 않아도 대답하자면. 한평생 생각만 하던 내게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을 한 저승사자가 찾아왔을 때 부디 이런 대화로 이어졌으면 해서였다.

 

“사랑해. 인제 그만 가자.”

“너 없이 뭐 하고 살았는지는 안 물어볼 거야? ”

“뭐든 하고 살았겠지. 그러다 내 생각도 가끔 했으니까 내가 네 앞에 나타난 것 아니겠어?”

“맞아. 너도 그러면 내 생각을 했어?”

“야. 세상에 생각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이어 끊어질락 말락 하는 웃음이 대화 끝을 늘어뜨리다가 평소와 닮은 걸음으로 천국이든 지옥이든 꽃 나라든 별나라든 도착하는 내가 보고 싶었다.


사실 죽는 순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생각에 잠겨 허우적대고, 남은 이십팔일조차 이따금 생각 정지 버튼을 연타하는 내가 ‘그냥 보통 사람’으로 구분되었으면 좋겠다. 그냥, 나는 최대한 보통이고 싶다. 최소한으로 바꿔야 하나. 최소와 최대 사이에서도 생각이 많아지는 나를 보며 “나도 그래.”라는 대답과 웃음이 돌아와야 하는데, 걱정하는 눈길만 이어질까, 지금도 속으로만 몰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5).


그러나 결국엔 몰래를 관뒀다. 이 글을 올리는 이상 더는 몰래 하는 생각이 아니다. 나는 오늘 브런치에 올리려던 글을 다 지우고, 대뜸 이 글을 올리기로 했다. 이 글이라기보다는 이 생각 덩어리를.


아주 먼 훗날이어도 좋고, 이른 시일 내여도 좋으므로 누군가가 우연히 이 글을 발견하고, 나도 그렇다고 하지 않을까. 그런 기대에서였다. 기대가 현실로 나타난다면 그때 난 이렇게 대답해 줘야지. 너도 그래? 나도 그래. 우리 다 그런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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