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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R Aug 05. 2024

어느 날 갑자기 '작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독자가 있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의 책임감

"일단 경험하는 것"에 목적을 둔 공저 쓰기


막연히,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야지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이웃 블로거들 중에 전자책을 발행한 사람들이 많아서 전자책은 써봐야겠다 생각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종이책은 아직 아니었다.  

블로그에 글을 끄적대는 수준인데 무슨 종이책을 내겠다고 하나 싶어서였다. 한 권의 책 전체 원고를 쓸 수 있을만한 능력이 아직 나에게는 없었다.

단지, 블로그 글쓰기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글쓰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 생각했다.


고맙게도 온라인 세상에는 글쓰기에 대한 무료 특강들이 많았다. 단순 검색의 결과였는지, 누군가의 블로그를 타고 타고 가다 발견한 것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찌어찌 무료 특강을 발견했다. 2권의 공저와 1권의 개인 책을 출간한 작가의 특강이었다. 뭐라고 하나 들어나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강했다.

특강을 듣고 나니 듣기 전과는 다른 세상이 있었다. 가볍고 편안한 블로그 글쓰기만 하던 것이 좀 지겨워지고 있던 차에 신선한 자극이었다. 글쓰기에 있어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이름으로 된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세상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분이 운영하는 톡방에서 함께 글쓰기를 했고, 다음 달에 진행되는 무료특강도 들었다. 그렇게 세 번째 특강을 듣던 즈음, 책을 함께 쓰고 싶은 사람 10명을 모아 공저를 발간하겠다는 공지글이 올라왔다.


'내 주제에 무슨 종이책'이라는 생각과, '어차피 공저를 쓰나 안 쓰나 시간은 흘러갈 텐데, 한 번 해봐?' 하는 생각이 오갔다. 게다가 공저 출간이라는 것이 개인이 출판비용을 조금씩 부담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자비출판. 이렇게 책을 내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공저 쓰기를 신청했다. 누가 욕하든 말든, '일단 쓰는 것, 경험해 보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종이책이라는 것을 한 번 써봐야 이후에도 계속 쓸 수 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0명이 함께 쓰는 것이니 부담도 적을테니 기대 보기로 했다.  



"이번 모임부터 서로를 '작가'라고 부를게요."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저 쓰기. 첫 번째 모임에서 리더인 작가가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서로를 '작가'라고 부를 거예요. '작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겁니다. '독자가 있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의 책임감을 가집니다."


헉. 책을 발간하지도 않았는데 '작가'라니. 000 작가님, *** 작가님이라면서 서로를 부르는데, 내 이름 뒤에 붙는 '작가'라는 호칭이 너무 어색했다.


보통 작가가 된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꿈이 '작가'였거나,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많이 탔거나, 라디오 방송에 글을 보낸다던가, 연애편지를 쓴다던가 했던 사람 아닌가? 관련 학과를 전공했거나, 관련 일을 했거나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글 잘 쓴다는 칭찬을 좀 받아본 사람 말이다.

 

나는 어린 시절 글쓰기 대회에서 몇 번 상을 타본 적이 있지만, '작가'가 꿈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린 시절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청소년기에는 책을 읽지 않았다. 문학 소녀도 아니어서 고전문학은 거의 읽지 않았다. 어른이 돼서는 관심분야 책만  파는 편독을 했다. 사회과학, 심리학, 육아서, 자기 계발 등등 내 삶에서 필요한 책들만 읽었다. 지금도 소설을 잘 안 읽고, 에세이도 최근에야 읽기 시작했다.     


그런 내가 공저를 쓴다고 '작가'라 불리다니. 이래도 되나 싶어졌다.

 


사진: Unsplash의 Andrew Neel



누구나 원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는 세상


하지만 세상을 돌아보면, 나의 생각이 고루한 걸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등단을 해야만 작가가 되고 인정을 받았다면,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다, SNS에서 영향을 발휘하다,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다 책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하기도 하고 자신이 원고를 써서 출판사에 투고를 하기도 한다. 자비출판을 하기도 하고, 독립출판도 하고 전자책을 쓰면 작가가 있다. 글을 쓰고 있는 '브런치'도 좋은 작가들을 찾아서 출판을 해준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사람 모두를 '작가'라고 불러준다.  

바야흐로 누구나 원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누구를 작가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책 한 권 쓰고 글쓰기를 멈추었다면 그를 작가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더 집중해야하지 않을까.


작가 애버크롬비의 말처럼 "'진짜 작가'는 그저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   


작가 바버라 애버크롬비는 미국에서 '작가들의 멘토'로 유명하다. 그는 '작가의 시작'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작가 생활 초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식탁에서도 글을 썼고, 젖을 먹이면서도 글을 썼으며 침실의 낡은 화장대에 앉아 글을 썼고, 나중에는 작은 스포츠카 안에서 학교가 파하고 나올 아이들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 돈이 없을 때에도 타자기를 두드리는 것 말고는 가계에 도움을 주는 게 없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글을 썼다. 내가 정말 작가인지 아니면 교외에서 미쳐가는 애 엄마일 뿐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진짜 작가'는 그저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출처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290928



그렇다고 단순히 '쓰는 사람=작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자기만 보기 위해 '일기'쓰는 사람, 다이어리 쓰는 사람을 '작가'라고 하지 않는다.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야 작가인 것이다.

글쓰기는 사적인 과정이지만, 부단한 책임감이 필요한 공적인 작업이다.


그러니 '작가'는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는 사람이다. 지금 글을 쓰는 사람, 나의 글을 읽는 사람이 있는 사람.


애버크롬비가 왜 저렇게 처절하게 글을 썼겠는가. 저렇게 글을 써야만 독자에게 읽히는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저 쓰기 모임에서 들었던 '독자가 있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의 책임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라고 느끼는 데는 두 가지가 핵심인 셈이다. 하나는 나를 작가로 여겨주는 사람들의 존재. 둘은 나 자신이 현재 진행형으로 글 쓰는 사람일 것. 이 두 가지를 지니면 작가가 된다. 실제로 두 가지가 모두 계속 이어질 때, 글 쓰는 사람 자신이 '지금도 작가'라고 생각한다. p79~80

-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정지우



온라인으로 글쓰기를 시작해서 다행이다.


애당초 작가의 꿈이 없었던 나는 뭔가를 끄적끄적해보고 싶어 블로그 글쓰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누군가가 읽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글을 썼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을 '독자'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실체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

이것은 내 문장을 재차 확인하게 만들었다. 온라인 공간에 쓰는 글 중에 혐오와 차별, 불평불만을 만들어 내는 글도 많지만, 나는 그런 글을 쓰느라 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부족한 나의 글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썼다. 내 생각이 잘 담겼는지, 내 글이 오해를 만들거나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을지 검토하면서 글을 쓰고 발행했다. 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내 아이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썼다.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해서 다행이다. 어느 갑자기 '작가'로 불리며 '독자'라는 존재가 생겨버려 어색하기 작이 없지만 말이다.  




표지사진 @ Unsplash의 Kaitlyn B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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