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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R Aug 02. 2024

'따로 존재'하는 내가 통합되는 글쓰기

글감과 내가 연결되는 방식

나는 나를 글감으로 하는 에세이 형식의 글을 쓴다.


소설 쓰기는 내가 할 수 있는 글쓰기의 영역이 아니다. 인물을 구상하고 스토리를 엮는 소설가들의 창조적인 작업은 감히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이니 단념했다. 특정 주제를 가지고 논평하거나 분석하는 글을 쓸 재주도 없다. 그래서 나의 일상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쓴다.  


현재 나의 글쓰기의 글감 중 첫 번째 영역은 필사글이다.  


"감사는 타인의 선함에 집중하는 행동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어떤 좋은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하게 한다.

- 소비 단식 일기, 서박하"     


위의 글을 필사했다면, '감사'를 글감으로 하여 글을 쓰는 것이다.   


두 번째 영역은 정말 '일상' 그 자체다.

있었던 일 중에서 글감을 찾아내 어떤 의미와 연결시킨다.

일상을 글감으로 쓰기 위해서는 기록, 메모가 필수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짧게라도 하루를 기록했던 습관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두 가지 글감 모두 경험만 가지고는 글이 되지 않는다. 경험에 나만의 생각, 느낌을 덧붙여야 한다. 그러려면 나만의 생각이 있어야 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았다. 글감을 노려보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떠올려봐야 하고, 경험이 떠오르지 않으면 인터넷을 뒤졌다. 나의 경험을 떠올려 줄 마중물을 찾으면서.

이런 작업을 매일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글감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가끔은 '현실을 사는 나'와 '현실을 살아가는 나를 글감으로 글 쓰는 나'가 '따로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내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매일은 때론 신기하고, 때론 재미있으며, 때론 성찰적이다.

그냥 흘려보낼 수 있던 사건들이 글이 되면서, 그 사건이 다채로워지고 의미가 부여되며 내 삶의 한 장면으로 남는다.  



@ Unsplash, DANNY G


상담실에서도 '따로 존재'했던 경험이 있었다.


30대 초반, 자청하여 개인상담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1년 반의 기간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받으면서 한 편으로는 심리학 책을 쌓아놓고 읽었다. ''라는 사람을 주제로 논문 쓰듯 공부했던 기간이었다.


1주일에 한 번 상담실에 가면 상담 선생님이 물었다.

"한 주 동안 잘 지냈어요?"

내가 이런 이런 일이 있었다고 답한다.


상담선생님이 다시 묻는다.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나요?"


상담 초기에는 예전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상담을 반복하면서 툭! 비슷한 경험이 튀어나왔다. 어떤 때는 쿵! 하고 떠올라 말보다는 눈물이 먼저 나오기도 했다.

상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경험을 연결하고, 마음을 연결하면서,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알아차림'을 반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을 계속하니, 스스로 나를 분석하고, 스스로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날은 '이런 얘기를 해봐야지' 마음 먹고 상담실에 들어섰는데, 전혀 다른 얘기를 하게 될 때도 많았다. 상담이 다 끝나고 돌아서서 나올 때가 되어서야, '아,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는데'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미리 마음먹었던 이야기든, 실제로 상담실에서 했던 이야기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모두 나에 대한 이야기였으므로...


아무리 사소한 일이더라도 상담실에서 꺼내놓을 만한 사건이라면, 분명히 내 안의 나와 연결되는 어떤 지점이 있었다. 부모님과의 관계, 친구 관계, 나의 성격, 나의 고통, 나의 슬픔, 나의 기쁨 등등. 그리고 과거의 어떤 지점에서의 내가, 현실의 나를 만들었다.  


상담실에 들어가서 상담을 받을 때 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 '현실을 살아가는 나를 관찰하여 과거와 연결시키는 나'로 따로 존재했다. 상담이 계속되자 상담실 밖에서도 두 존재로 생활하게 되었다. 이 두 존재들은  서로 싸우면서 부정하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서로를 받아들여 갔다. 그렇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서로 이해하고 통합되면서 치유되었다.

   

이 과정은 처절하게 고통스러웠으나, 성인이 된 이후 내 삶의 전체 과정 속에서 가장 의미 있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며 나는 비로소 어른다운 어른으로 설 수 있었고,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자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로 존재'하는 나를 통합시키는 글쓰기가 좋다.


글쓰기를 하는 요즘, 또다시 상담실에서 경험했던 '따로 존재'하는 나를 본다.

상담을 받을 때는 상담선생님의 도움과 나의 말로 따로 존재하는 나를 통합시켰다면, 지금은 글을 씀으로써 두 존재를 통합시킨다.

지나가버린 과거의 나를 붙잡아 글로 남기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글쓰기를 매일매일 하는 것은 본질을 찾아가는 작업이 된다. 나의 이런 마음을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에서는 아래와 같이 썼다.


글 쓰는 습관은 매일을 '뒤돌아보게' 한다. 글쓰기는 계속 오늘이나 어제 일어난 일, 10년 전이나 20년 전에 일어난 일을 되새김질하게 하면서 그때의 본질이랄 것을 찾게 한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미래 지향적인 여러 일들, 특히 사업이나 금융계의 일과는 크게 대비된다. 글쓰기는 계속 우리 과거를 다져가면서 삶의 내부 혹은 자아의 안쪽을 채워 넣고 그것을 삶의 기반으로 삼는 일에 가깝다.
(중략)
현대사회 혹은 자본주의 프로세스와는 별개로, 인간은 결국 과거에 뿌리내리고 살 수밖에 없는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글 쓰는 능력과 태도는 사람들에게 항상 '잊고 있던 무언가'를 환기하는 느낌을 준다. (중략) 글쓰기는 바로 그런 사람의 마음에 적중하는 측면을 구조적이고 본질적으로 갖고 있다. 멈추거나 역행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삶을 역행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글쓰기가 갖는 특별한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p65~67,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정지우


정지우 작가는 '멈추거나 역행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삶을 역행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글쓰기가 갖는 특별한 지점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상담을 받을 때도 '멈춰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알아차림'을 강조한다. 나아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바라보고 알아차리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글쓰기를 통해 치유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구나를 배워가는 요즘이다.


물론 모든 상담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글쓰기가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나는 운이 좋았다. 나에게 맞는 상담 선생님을, 적절한 때 만났으니.

이제 나에게 맞는 글쓰기 방법을 찾아 또다시 나의 매일을 치유로 이끌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서 내가 끙끙거리면서도 매일 글을 쓰고 있나 보다. 가지 말까 고민하다 결국은 상담실로 향해서 눈물 한 바가지 쏟고 상담을 마쳤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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