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시험공부를 위한 나만의 루틴이 있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책상 위를 공부하기 좋게 세팅하기.
교과서, 참고서, 노트, 필통 등만 남기고 책상을 정리한다. 책상을 넓게 쓸 수 있도록. 책상 정리한다면서 서랍 정리까지 하는 성격은 아니었던 듯하다.
뒤이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라디오를 켜는 것이었다.
이문세 아저씨의 '별의 빛나는 밤'부터 시작해서 12시를 넘겨 새벽으로 이어지는 순간까지, 나의 공부 친구는 라디오였다. 공부하다 좋은 노래가 나오면 테이프에 녹음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새벽으로 넘어가면 DJ의 말소리가 줄어 드니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됐었다. 혼자 깨어있는 새벽 시간, 라디오마저 없으면 적막할 것 같아서 틀어두기 시작한 것이 나의 공부 루틴이 되었다. 주말 낮에도 항상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했다.
글쓰기를 시작하니 루틴이 필요했다.
써야지 마음을 먹어도, 막상 닥치면 쓰지 않게 되는 것이 글쓰기다. 글로 내 생각을 풀어놓는 작업 자체가 힘든 일이니 그럴 것이다. 설거지만 해놓고 하자, 빨래만 개 놓고 하자, 저기 먼지만 닦고 하자 하게 된다.
어찌어찌 책상에 앉았다 해도, 내 눈앞에 놓인 노트북은 인터넷으로 연결된 딴짓 가득한 세상이다. 적어도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인터넷이 없었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뉴스도 보고, 쇼핑도 하고, 무슨 책이 나왔나 검색도 해보고... 이러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흘러있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생각했다. 매일 글을 써야 하니, 글쓰기를 최우선에 둔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야 했다. 마치 중고등학교 시험 기간으로 돌아간 듯 말이다.
가장 먼저 글 쓰는 시간을 정했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으니, 내가 시간을 정할 수 있었다. 한참 미라클모닝을 해보겠다고 할 때는 새벽에 글쓰기를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글 쓰려고 끙끙거리는 도중에 아이들이 깨어나서 아침밥을 해줘야 해서 포기했다. 점점 새벽기상도 힘들어졌다.
그리하여 정착된 글쓰기 시간은 아이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뒷정리를 마무리한 후인 9시경부터 12시까지. 처음에는 이 시간에 블로그 글 한 개 쓰기도 힘들었다. 이 시간에 못쓰면 점심 먹고도 쓸 수밖에 없지만, 내가 정한 시간 내에 글을 써내려 애썼다. 그래야 오후 시간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2개까지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글쓰기 장소를 정했다.
첫 번째 장소는 우리 집 거실의 넓은 테이블이다.
오전 시간, 홈스쿨링 하는 둘째 아이와 나는 마주 보고 앉는다. 아이는 공부를 하고, 나는 글을 쓴다. 글쓰기를 위해서는 안방에 있는 나만을 위한 작은 책상이 더 좋다. 하지만 나는 엄마다. 나의 글쓰기보다는 아이의 공부를 위해 세팅된 거실의 공간에서, 아이가 질문하면 답해주고, 아이의 홀로 공부를 격려하면서 글을 쓴다. 계속 쓰다 보니, 이 장소에서 글쓰는 것이 익숙해졌다.
두 번째 글쓰기 장소는 집 근처 카페다.
공저를 쓰고 브런치 글을 쓰다 보니 집중해서 글 쓸 공간, 시간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둘째 아이와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카페로 나가기 시작했다. 오후는 둘째 아이가 공부를 마친 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이니,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큰 아이 픽업해 오고 저녁밥을 해주기 전까지 나는 자유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하니, 카페에서 집중해서 글 쓰고 책 읽는다.
사진: Unsplash의 Alphacolor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에 앉은 후,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음악'이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라디오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나는 평상시에도 방송을 켜둔다. 팟캐스트, 유튜브 등을 통해 여러 채널의 양질의 방송을 들을 수 있어서 좋은 세상이다. 하지만 이 방송들을 들으면서 글쓰기는 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때는 라디오 들으면서 어떻게 공부했나 싶다. 젊어서, 집중력이 좋아서 가능했을까.
글쓰기를 위해서는 다른 들을 꺼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들이 유튜브 음악 플레이리스트들이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열면 가장 먼저 유튜브에서 '카페 음악', '지브리 음악', '재즈 음악' 등을 재생시킨다. 그러면 순식간에 글쓰기 모드로 전환된다. 빨리 글쓰기 모드로 전환되어야 낭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으니, 적극 사용하게 된다. 카페에 가도 이어폰을 꽂고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음악을 듣는다.
신기하게도, 글쓰기 전에 전용 음악을 듣는 것은 많은 글쓰기 책들에서 제안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나도 한 문장도 잘 쓰면 좋겠네(박선영)>에서도 유튜브에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글쓰기 전용 BGM을 찾으라고 제안하고, <처음부처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이다혜)>에서도 음악을 고르라고 한다. 특히 이다혜 작가는 여유 있는 마감일 때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바흐와 그의 시대의 모든 곡을 작업용으로 쓴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도 먹고살려고 이렇게 많은 곡을 썼다는 점을 상기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라고 했다. (p53,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다혜)
글쓰기 루틴을 지키는 진짜 이유, 바쁨과 마감
이렇게 루틴을 정해놓고도 안 지키면 그만일 텐데, 나는 왜 루틴을 지키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글쓰기 루틴을 지키는 첫 번째 이유는 내가 바쁘기 때문이다. 내가 글쓰기 외의 일로 돈도 벌고, 살림도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한다. 바쁘기 때문에 글을 쓰려면 틈을 내야 하고, 4그 틈에 죽이 됐는 밥이 됐든 글을 완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리저리 방황하기보다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작 수순이 있어야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마감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정해둔 블로그 발행 시간은 매일 아침 7시와 낮 12시. 나만 아는 나만의 마감이다. 매일 아침 7시에 글을 발행하려면 전날 써두어야 하고, 12시에 발행하려면 당일 12시 전에는 글을 써야 한다. 마감을 지키지 않는다고 아무도 혼내지 않고 아무도 독촉하지 않지만, 내가 정해 놓은 마감시간을 지키려 애쓴다. 그래야 딴짓하지 않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딴짓을 하다가도, 문득 시계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어 글을 쓰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애용하는 글쓰기 루틴은 매일 턱밑에 차오른 마감에 허덕이며 우는 것이다.
(중략)
방법 6. 마감. 글 쓰는 사람들이 가장 큰 도움을 받는 루틴. 마감이 되어야 글을 쓰기 시작하는 마감 중독자들은 증세가 심해지면 마감이 지나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글 써서 먹고살기 위한 제1의 요령은 마감 지키기다. 어쩌면 마감이 원고를 쓰는지도 모른다.
- p52~53,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다혜
이쯤 되니 내가 바쁜 사람이고, 마감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꾸준히 글을 쓰게 만들어주니 말이다.
표지사진: Unsplash의 Glenn Carstens-Peters